"모든 예술은 미술을 동경한다"

[서평]공주형의 <사랑한다면 그림을 보여줘>를 읽고

등록 2006.03.17 11:15수정 2006.03.17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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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사랑한다면 그림을 보여줘>

<사랑한다면 그림을 보여줘> ⓒ 학고재

미술 서적이 즐비한 서가를 돌다가 빛바랜 책들 사이에서 공주형의 <사랑한다면 그림을 보여줘>를 만났다. 한낮 도서관의 텅 빈 공간 속으로 새어드는 빛은 책과 나를 동시에 비추고 있었는데, 이 책은 그 빛처럼 밝고 따뜻했다.

저자가 소개하는 수많은 그림들은 하나같이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듯했다. 저자는 생활의 연장선상에서 모든 그림을, 예술작품을 대한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해서 큐레이터가 되었겠지만 정제된 언어로 그림을 소개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작업은 아닐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저자가 그림에 좀더 다가가기 쉽도록, 이해의 폭을 넓히도록 정성을 다해 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베르메르 - 조용한 날의 찬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1년에 작품을 한 두 점 밖에 남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화가이자 화상으로 11명이나 되는 자녀를 부양하고 장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축내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쓰느라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베르메르를 알게 된 건 순전히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소설 <진주귀고리 소녀>를 통해서였다. 그런 이유로 실제의 삶보다 소설화된 그의 삶이 오롯이 내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 <진주귀고리 소녀>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해서 베르메르를 떠올리자면 그의 얼굴에 자꾸만 콜린 퍼스라는 배우가 겹쳐지기도 한다.

투박한 단지에서 시작된 우유 줄기는 공간을 가르고 마침내 넓적한 그릇에 다다른다. 이쯤에서 빈한한 부엌은 절제된 공간으로 승격되며, 힘겨운 노동은 경건한 의식으로 탈바꿈한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으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 우유를 따라 흐르는 일정한 리듬과 속도는 지난 사백 년 동안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경외감은 그녀가 잡고 있는 영겁의 시간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이 책에는 베르메르의 작품 가운데 <우유를 따르는 여자>와 <레이스 뜨는 여자> 두 점만이 소개되어 있다.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고 그럴 듯한 배경에서 그려지기를 기다리는 여자를 모델로 삼은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일을 화폭에 담아내면서도 진부하지 않게 어떤 의미를 담아냈다. 두 작품은 모두 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을 준다. 독자들은 흰 우윳빛에 시선을 멈추게 될 것이고, 레이스를 뜨는 찰나의 정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르누아르 - 인생은 아름다워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1841년 프랑스 리모주에서 가난한 양복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만 보고서는 그가 얼마나 궁핍한 환경에서 그림을 그렸는지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작품 <피아노 치는 소녀들>만 보아도 얼마나 평화로운 기운이 배어있는 작품인지 한참을 보아도 감탄의 그림자가 사라질 줄 모른다.


저자는 르누아르의 그림이 '소풍날이나 운동회처럼 삶에 대한 흥분과 떨림으로 가득하다'고 이야기한다. 생애 대한 '긍정'과 '낙관'으로 그의 그림들은 밝고 따스하고 즐겁다. 힘든 세상을 살아간다고 해서 그림까지 우울할 필요는 없다는 르누아르는 그런 이유로 언제나 행복한 사람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식사>와 <물랭 드 라 갈레트>도 함께 소개되어 있는데 저자의 말처럼 모두 다 '우리의 가슴에 삶에 대한 생기와 의욕을 불어넣기'에 충분한 작품들이었다.

르누아르는 말년에 폐병과 류머티즘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창작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를 염려하는 많은 이들에게 "고통은 금방 지나가 버리지. 그러나 영원히 남는 게 있다네"라는 말로 그들의 걱정을 잠재웠다고 한다. 르누아르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영원히 남아 많은 사람들에게 영혼의 안식을 제공할 것이다.

휘슬러 - 모든 예술은 음악을 동경한다

아일랜드계 미국 화가 제임스 맥닐 휘슬러는 전쟁 중이던 어느 해 칠레를 여행하고 나서 영국으로 돌아와 밤의 풍경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아마도 칠레에서 머무는 동안 인상적인 경험이 그의 작품 세계에 새로운 성찰의 시간을 제공했을 것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했다. 직접 목격한 풍경을 기억에 의존해 완성하려고 노력했던 휘슬러는 있는 그대로의 현상에 집중하기보다는 해안선이나 하늘빛 또는 물색에 비중을 두었고, 그 결과 <검정과 금색의 녹턴-떨어지는 불꽃>이나 <녹턴-트라팔가 광장, 첼시, 눈>과 같은 작품이 탄생하게 되었을 것이다.

위에 소개된 그의 두 작품을 잠시 감상하고 있자니 마음속에서 무언가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만 같다. 어쩌면 독자들은 이 작품만으로는 갈증이 느낄 지도 모르겠다. 더 많은 작품들을 감상하고 나면 좀더 그를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휘슬러가 법정에서 인정받은 '녹턴' 연작은 쇼팽의 <야상곡> 마스네의 <타이스의 명상곡>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 로드리고의 <아랑후에스 협주곡> 비제의 <아를의 여인>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 등과는 분명 다르다. 그럼에도 나는 이 리스트에 휘슬러의 '녹턴' 시리즈를 추가하고 싶다. 잔잔한 한밤의 서정에서 폭발하는 어둠의 상념까지 폭넓게 노래했던 그의 그림은 음표가 아닌 색채로 모든 예술이 동경해 마지않는다던 바로 그 음악 상태를 구현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쇼펜하우어가 '모든 예술은 음악을 동경한다'고 했다지만, 어디 음악뿐이겠는가. 모든 예술은 미술도 동경한다. 지면이 협소한 관계로 소개하지 못한 많은 작품들이 이 책 속에 알알이 열매 맺고 있다. 책을 통해 새로운 예술가와 작품을 만나는 일은 가뭄에 단비처럼 커다란 기쁨을 가져다준다.

큐레이터 공주형의 <사랑한다면 그림을 보여줘>는 멋진 모습을 자랑하는 배우를 캐스팅한 것처럼 좋은 작품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한 편 같다. 또 시나리오는 얼마나 탄탄한지. 독자들은 '잘 차려놓은 식탁에 앉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사랑한다면 그림을 보여줘 - 다정한 큐레이터 공주형이 사귄 작품들

공주형 지음,
학고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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