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그 명성은 감동으로 이어진다

[공연리뷰] 진한 감동과 깊은 각성을 갖게 하는 뮤지컬 '명성황후'

등록 2006.03.17 10:21수정 2006.03.20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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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명성황후의 혼이 나타나 백성들에게 '일어나라 일어나라'며 각성을 촉구하는 마지막 장면.

명성황후의 혼이 나타나 백성들에게 '일어나라 일어나라'며 각성을 촉구하는 마지막 장면. ⓒ 에이콤인터내셔날

명불허전(名不虛傳). 공연을 관람하고 나서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단어는 바로 이 고사성어였다. '역시 명성황후야'라는 감탄과 환호가 객석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기립박수로 멋진 연기를 펼친 배우들에게 화답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가슴 시리도록 전해지는 감동과 한편 빼앗겼던 나라에 대한 애틋함에 목이 메어온다.

지난 11일 대단원의 막을 올린 뮤지컬 '명성황후'는 다가올 10년을 대비한 세대교체를 통해 더욱 새로워진 출연진으로 채워져 있었다. 국내 뮤지컬 1세대의 선두주자격인 남경읍(대원군 분)과, 김성기의 대를 이어 더 젊어진 미우라를 연기하고 싶다는 김법래, 그리고 명성황후를 향한 애달픈 사랑을 노래하는 이상현(홍계훈 분)이 그들이다.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에 들이닥치고 궁 안은 어느새 선혈이 낭자하다. 죄 없는 궁녀들과 훈련대 군사들은 물론 명성황후까지 왜인들의 서슬 퍼런 칼날에 희생되고, 일순 객석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 속으로 빠져든다. 과거의 사건이요 무대에 올려진 장면일 뿐이긴 하나, 백성된 자로서 그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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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콤인터내셔날

열강의 발호(跋扈)에 휘둘려 우왕좌왕 대다 결국 국모까지 외세에 빼앗긴 이 어이없는 역사 앞에서, 커다란 교훈을 얻었음에도 역시 기분은 석연치 않다. 그나마 씁쓸한 기분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것은 이날(16일) 일본의 콧대를 보기 좋게 눌러준 야구 국가대표 선수들 덕분이리라.

두 번에 걸쳐 공연을 관람한 후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역시 무대와 의상이었다. 수입뮤지컬 대작에 '아이다'가 있다면 우리의 창작뮤지컬에는 '명성황후'가 그 자리를 공고히 지키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 공연이었다. 화려한 색감의 의상과 왕실의 무게감을 잘 표현해 준 무대배경 역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도 부족할 정도이다.

무엇보다 무대의 공간 활용과 배우들의 동선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게 특수제작한 회전무대가 압권이었다. 특히 이 무대장치는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장면에서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그렇다면 배우들의 연기는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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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콤인터내셔날

지난 10년간 90여만 명의 국내외 관객을 동원한 베스트셀러답게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는 그 누구 하나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특히 명성황후를 가까이 보필하는 두 상궁과 중국의 대신, 그리고 게이샤로 분한 이들의 활약은 눈부셨고, 감칠맛을 더해 극의 흐름을 여유롭게 만들었다.


중후한 음성으로 객석을 압도한 대원군 역 남경읍과, 약간은 답답해 보일 수도 있는 음색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해낸 고종 역 윤영석의 호연도 눈여겨 볼만 하다. 하지만 '명성황후'의 수퍼루키는 역시 홍계훈 역을 맡은 배우들이었다.

이필승과 이상현은 각자의 개성에 맞게 조금은 다른 홍계훈 역을 선보였지만, 둘 다 빼어난 연기력과 풍부한 감성으로 명성황후를 남몰래 흠모하는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많은 관객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이끌어냈다. 심금을 울리는 그들의 포효는 넓은 공연장을 꽉 채우고도 남았고, 일본 낭인의 칼에 숨을 거두며 절규하는 장면에서는 선굵은 연기로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그런가 하면 훗날 순종이 되는 세자 역과, 명성황후의 죽음을 암시하며 노래를 부르는 저잣거리의 아이들 역의 아역배우들은, 그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흠잡을 데 없이 놀라운 노래실력으로 관객들에게 많은 박수를 받았다. 십여 년 후에 이 어린 배우들이 어떻게 성장해 어떤 배역으로 우리 앞에 설지 벌써 설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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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콤인터내셔날

'명성황후'에는 두 명의 명성황후가 연기대결을 펼친다. 먼저 2003년 명성황후를 통해 뮤지컬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던 이상은의 연기는 기대 이상이었다. 각종 국제성악 콩쿠르에서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성악가 출신답게 풍부한 성량과 음악적 기교를 맘껏 보여줬으며, 연기 또한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럼에도 명성황후의 히로인은 역시 이태원이었다. 그녀의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는 관객들의 혼을 빼앗기에 충분해 보였고, 부드럽고 섬세하기까지 한 연기와 노래에 기자는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인터뷰 때 그녀가 밝힌 바와 같이 '장기집권'을 하는 이유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아래 관련기사 참고).

a 명성황후를 관람할 때 눈여겨 봐야 할 포인트 중 하나. 쇄국정책을 강하게 펼치는 대원군과 그에 맞서 고종에게 친정을 선포하라며 압박하는 명성황후 간의 갈등은 극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명성황후를 관람할 때 눈여겨 봐야 할 포인트 중 하나. 쇄국정책을 강하게 펼치는 대원군과 그에 맞서 고종에게 친정을 선포하라며 압박하는 명성황후 간의 갈등은 극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 에이콤인터내셔날

관록이 돋보이는 '영원한 명성황후' 이태원과 여린 것 같으면서도 기대 이상의 연기력을 보여주는 이상은의 공연, 그 어느 것을 선택해도 후회는 없으리라 여겨진다.

'명성황후'는 소재와 주제 모두 무거운 것들이기에 약간은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는 공연이다. 허나 쉼없이 이어지는 화려한 무대와 아름다운 음악에 심취한다면 시간가는 줄 모를 수도 있다. 특히 임오군란과 청일전쟁, 아관파천 등으로 이어지는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목도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커튼콜을 하고 있는 배우들이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a 개항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이는 외세에 맞서 전투가 펼쳐진 장면

개항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이는 외세에 맞서 전투가 펼쳐진 장면 ⓒ 에이콤인터내셔날

이 공연의 특징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겠다. 먼저 역사적인 사실들을 현장감 있게 그려냈다는 것이다. 개화를 앞두고 수구파와 개화파 간에 벌어지는 정쟁과 조선 병사들의 무술경연, 그리고 두 차례 공주를 잃은 후 세자를 얻기 위해 수태굿을 벌이는 장면에서는 사실감이 한껏 고조된다.

외국인에게는 토속적인 내음이 물씬 풍겼을 굿판에서는 특히 '그분이 오셨음을 느끼게 하는' 진령군의 표정이 너무 실감나서 흠칫 놀라는 이들도 많이 눈에 띈다. 객석의 동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개항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이는 외세에 맞서 총격전을 벌어지는 장면에서는, 갑자기 터져나오는 실감나는 총성에 가슴을 쓸어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서슴없이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내는 일본의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면, 작금의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음에 몸서리쳐지기도 한다. 특히 명성황후가 잔인할 정도로 비참하게 시해되는 장면에 이르면 '나라도 무대에 뛰어올라 막아내야겠다'는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a 제국주의의 만행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섬뜩함이 느껴진다.

제국주의의 만행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섬뜩함이 느껴진다. ⓒ 에이콤인터내셔날

사실적으로 묘사된 장면 장면마다 관객들은 그 역사의 현장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듯한 감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탁월한 연출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조명과 무대장치를 통해 두 장면이 동시에 오버랩되게 하는 연출로 극적 효과를 극대화시킨 것은 물론, 다소 무거울 수 있는 공연분위기를 감안해 중간중간 감칠맛 나는 무대를 삽입한 것 또한 높이 살만하다. 특히 대원군에게 개화를 요구하는 장면에서는 대신들이 경쾌한 춤과 음악을 선보여 공연장의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리기도 했다.

이 외에도 언급할 내용은 너무 많지만 더는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직접 공연장에 가서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력과 화려한 무대를 체험하시라. 요즘 두 번 이상 공연을 반복해서 보는 마니아들이 늘고 있는데, 처음 봤을 때보다 음악과 무대 등이 더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잘 보이지 않고 다소 빠뜨렸을 수도 있는 부분들을 섬세하게 잡아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사물놀이팀을 포함한 30인조 오케스트라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선율은, 자칫 무대의 배우들을 소홀히 할 수도 있을 만큼 환상의 앙상블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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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콤인터내셔날


용기와 지혜를 모아
동녘 붉은 해 스스로 지켜야
동녘 붉은 해 스스로 지켜야


상복을 입은 명성황후가 객석에 던지는 이 당부를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자연스레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비통한 역사의 주인공이 '백성들이여 일어나라'고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가 현재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너무도 크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 *뮤지컬 '명성황후'는 오는 3월 30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합니다. 

*맛있는 음식과 멋스런 풍경사진을 테마로 하는 제 홈피 '멀리서 바라보다 뜨겁게 사랑하기' 
(http://blog.naver.com/grajiyou)에도 올려 놓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뮤지컬 '명성황후'는 오는 3월 30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합니다. 

*맛있는 음식과 멋스런 풍경사진을 테마로 하는 제 홈피 '멀리서 바라보다 뜨겁게 사랑하기' 
(http://blog.naver.com/grajiyou)에도 올려 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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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고 대자연을 누리며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서울에서 평생 살다 제주에서 1년 반,포항에서 3년 반 동안 자연과 더불어 지내며 대자연 속에서 깊은 치유의 경험을 했습니다. 인생 후반부에 소명으로 받은 '상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더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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