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는 아픈 몸 흙을 덮고 자네'

자주꽃도 하얀꽃도 같이 피는 감자밭

등록 2006.03.18 16:42수정 2006.03.2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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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밥을 먹고 출근 채비를 하던 남편이 문득 그랬습니다.


"감자 심어야 되는데… 언제 심지 이거? 이번주에도 시간 없고 다음 주에도 약속 있는데, 여보 감자 언제 심지?"
"그거야 남들 하는 거 보고 따라하면 되지 뭐. 벌써 감자 심을 때 된 거야?"
"그럼. 슬슬 준비를 해야지. 근데 여보, 감자 심을 때 감자 밑에 재를 좀 묻어주면 좋대."
"왜?"
"재를 좀 묻어주면 재가 보온 역할을 해서 감자 싹이 빨리 나온대."

씨감자를 잘라서 재를 묻히는 건 감자를 소독하기 위한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우리 남편은 이렇게 말했어요.

"에이 누가 그래? 자른 감자 소독하려고 재 묻히는 거지 무슨 보온이야?"

그러니까 남편은 아니라고 그럽니다. 재를 한 움큼 같이 묻어주면 보온이 되어서 감자 싹이 빨리 나고 튼튼하게 자란다고 누가 그랬답니다.

이제까지 반풍수 노릇하며 텃밭 농사를 지었습니다. 남들이 하면 그제야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 농사는 늘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 늦습니다. 그래도 올해는 미리 준비해 둔 게 있습니다. 바로 씨감자입니다.


지난 설에 고향에 내려갔더니 어머님이 따로 챙겨주신 게 있었어요. 가만 보니 자주감자였어요.

자주감자는 우리 어릴 때는 흔하게 보던 감자였지만 지금은 거의 보기가 힘든 감자입니다.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자주꽃 핀 건 자주감자 파보나마나 자주감자'란 동시에서 보던 바로 그 감자입니다.


길쭉하게 생겨서 피리감자라고도 불렀다는 자주감자
길쭉하게 생겨서 피리감자라고도 불렀다는 자주감자이승숙
자주감자는 진짜로 자주색 꽃이 핍니다. 그리고 감자도 자주색입니다. 껍질도 자주색이고 속살도 자주색입니다. 어릴 때 먹어본 제 기억으로는 맛이 조금 아렸던 거 같습니다.

자주감자는 다른 모든 것들처럼 자본의 논리에 밀려서 사라져 간 우리 토종 종자입니다. 알이 별로 굵지 않고 수확량이 많지 않다는 그 이유 하나로 도태를 당한 종자입니다. 그렇게 사라져 간 것들이 어디 하나 둘이겠습니까.

더디 자라고 덩치가 좀 작더라도, 그리고 알이 좀 적게 달리더라도 우리 토종은 또 그 나름대로 미덕이 있을 텐데 우리는 양만 생각하고 토종을 멀리 했습니다.

'파랑새'는 가까이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내 것을 밀쳐두고 남의 것을 따라 가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것의 소중함을 다시 평가하고 가치 매기는 시대로 돌아왔습니다.

자주감자는 알이 잘고 자라는데 좀 더딘 면은 있지만 추위와 습기에 강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래 보관해도 별다른 문제가 안 생깁니다. 또 병충해에 강하기 때문에 농약을 안쳐도 되니 친환경적으로 재배하기에 좋다고 합니다.

또 자주감자는 '안토시아닌'이란 성분이 있어서 자줏빛을 띤다고 합니다. 안토시아닌은 항산화활성을 높여 노화현상을 억제하는 효능이 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생으로 먹으면 위장 장애에도 좋다고 합니다.

봉지에 담아둔 자주감자를 꺼내 봤습니다. 별다르게 챙기지 않았는데도 거뜬하게 겨울을 이겨냈습니다. 썩었거나 무른 거도 하나 없습니다. 씨눈마다 싹이 다 솟아나옵니다. 역시 자주감자는 우리 민족을 닮은 거 같습니다. 생명력이 강하고, 차지고 오진 우리 민족을 닮은 것 같습니다.

'권태응' 시인의 시 한 편을 가만히 읊어 봅니다.

감자씨는 묵은 감자 칼로 썰어 심는다
도막도막 자른 자리 재를 묻혀 심는다
밭 가득 심고 나면 날 저물어 달밤
감자는 아픈 몸 흙을 덮고 자네
가다가 돌아보면 머언 밭둑에
달빛이 내려와서 입맞춰 주고 있네

덧붙이는 글 | 종일 감자를 심고 저물녁에야 돌아가는 길, 가다가 돌아보니 감자를 심은 밭둑에 달빛이 고요히 비추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거 같았습니다. 그리고 감자를 다 심고 아픈 허리를 두드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내 부모님이 보였습니다.

흉내만 내는 감자심기였지만 올 해는 마음으로 감자를 심어봐야겠습니다. 자주감자도 심고 하얀 감자도 심어서 하얀꽃도 자주꽃도 활짝 피는 감자밭으로 만들어 봐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종일 감자를 심고 저물녁에야 돌아가는 길, 가다가 돌아보니 감자를 심은 밭둑에 달빛이 고요히 비추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거 같았습니다. 그리고 감자를 다 심고 아픈 허리를 두드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내 부모님이 보였습니다.

흉내만 내는 감자심기였지만 올 해는 마음으로 감자를 심어봐야겠습니다. 자주감자도 심고 하얀 감자도 심어서 하얀꽃도 자주꽃도 활짝 피는 감자밭으로 만들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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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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