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지던 날, 재일한국인 어떤 표정이었을까

[서평] 가네시로 가즈키의 < GO >

등록 2006.03.20 11:10수정 2006.03.20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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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학'하면 일단 쿨한 영상이 떠오른다. 맥주 맛을 잘 알고 있는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 진지하면서도 문제해결에 있어 이성적이고 세련된 무라카미 류의 주인공, 꿈꾸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아름답게 인생을 엮어가는 바나나의 주인공.

일본 문학의 특징은 일단 국가색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문학은 다른 어떤 나라의 상황을 대입해도 거의 무리 없이 내용이 받아들여질 정도로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인지 일본의 많은 작가들은 세계적인 독자군을 거느리고 있고 대표적인 일본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국적을 초월한 세계인'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다.


반면 '한국 소설'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픔, 회한, 고통, 안타까움'이다. 한국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고도 경제 성장과 분단, 그에서 파생되는 복잡 미묘한 정치적 상황, 아직도 시뻘겋게 살아있는 레드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그 산물이다. 물론 많은 젊은 작가들이 이러한 한국의 시대적 상황에서 자유롭고 쿨한 소설을 상당량 배출해내고 있지만 그러한 작품들조차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 아득한 저변에 우리나라의 복잡한 역사적 상황의 아우라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아직도 분단이라는 어마어마한 족쇄에 사로잡혀 진정한 의미의 근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지구상에서 아직도 공산주의에 대한 금기가 서슬 퍼렇게 살아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 태어나 자란 곳의 시대적 상황이 이러한데 어느 누가 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글을 쓸 수가 있을 것인가. 어느 누가 완전히 쿨한,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을까. 분단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일본의 작가들이 그려가는 세련되고 유려한 세계를 볼 때마다 그런 안타까움이 가슴을 메웠다.

a 가네시로 가즈키 ,GO

가네시로 가즈키 ,GO ⓒ 북폴리오

이러한 이미지의 일본 작가군을 떠올리며 가네시로 가즈키의 작품을 펼쳐든 나는 한순간 숨을 '헉'하고 들이키고 말았다. 이 작가에게서 한국소설의 냄새가 일순간에 훅 끼쳐왔던 것이다.

...민족학교 얘기를 하면서, 이 인물에 관해서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절대로. 나는 어린 시절부터 김일성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를 질리도록 교육받았다. 공산(사회)주의 국가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지만 국민을 일치단결시키기 위해서는 역시 종교 같은 것이 필요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종교에는 카리스마인 교주가 필요하다. 요컨대 김일성은 종교의 교주 같은 것이다.

한참 '김일성 원수의 어린 시절'이란 수업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날의 수업은, 어린 시절의 김일성이 항일투사인 아버지를 체포하려고 자기 집에 들이닥친 일본 관헌을 직접 만든 새총에 자갈돌을 끼워 저격한다는 내용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김일성 원수는 어린 시절부터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내용이었지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뭐야, 우리들이 훨씬 더 훌륭하잖아.'...



내가 놀란 건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문학이라고 불리는 작품의 한복판에 '김일성'이라는 시뻘건 이름이 떡하니 등장했다는 것. 일본에 살고 있는 교포조차 남·북한 체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김일성'이라는 무서운 단어가 소설 한 복판에 시퍼렇게 등장해서 우스꽝스럽게 회자되고 있다는 것.

남·북한 통틀어서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아무 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소설에 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일본인이면서 '재일'이라는 굴레를 평생 안고가야 하는 한국계 일본인의 명료한 자의식이 이러한 우리의 역사적 상황을 명료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분단은 한국내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교포'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가는 한국계 모든 이들에게도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가즈키 소설의 주인공, '스기하라'는 '재일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인들에게서, '조선(북한)'에서 '한국(남한)'으로 국적을 바꾸었다는 이유로 한국인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한다. 일본인들에게 스기하라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열등하고 폭력적인 인간이고, 한국인들에게 스기하라는 조총련 출신이었다가 한국인으로 전향했기 때문에 비열한 배신자이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스기하라. 남들과 똑같이 일본말을 하고 엄연히 일본인으로 살아왔지만 일본 사회에서 그는 영원히 외국인, 그것도 열등하고 미개한 외국인인 것이다.

"현대 일본 사람들의 직접적인 조상이라 여겨지는 죠몬인 중에는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 이건 DNA 조사에서 밝혀진 사실이야. 그러니까 그 옛날의 몽골로이드는 모두가 술을 마실 줄 알았다는 얘기지. 그런데 약 이만오천 년 전 중국의 북부에서 돌연변이 유전자를 지난 인간이 태어났지. 그 사람은 술을 마시지 못하는 체질을 갖고 태어났어. 그리고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 사람의 자손인 야요이인이 일본으로 건너와서 술을 마시지 못하는 유전자를 퍼뜨린 거야. 너는 그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이고. 중국에서 생겨난 그 유전자가 섞여 있는 너의 피는 더럽니?"

한국인의 피는 더럽기 때문에 사귀면 안 된다고 교육받고 자라난 여자친구에게 자신이 한국인임을 고백하면서 스기하라는 길게 길게 열변을 토한다. 결국 순수한 일본인이란 없는 것이다. 우리의 피는 거슬러 올라 가보면 다 섞인 것, 그러므로 민족을 딱 잘라 구별 짓고 차별하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 짓이라고. 그러나 여자친구의 무의식에 낙인처럼 찍힌 '한국인의 피는 더럽다'는 생각에 그의 말은 조금도 스며들지 못한다.

스기하라가 작품의 전반에서 길게 길게 읊어내는 항변의 말들-순수한 민족개념이란 없으므로 결국 한국인의 피는 더럽다는 발상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은 전혀 세련되지 못하다. 세련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이건 그대로 작가의 육성이다. 차별받고 분류되어지던 숱한 기억에서 나오는 작가의 처절한 외침. 기나긴 세월 수 천 번도 더 혼자 되뇌었을 항변. 'GO'의 주인공 스기하라는 거의 작가 자신이나 다름없다. 조금도 세련되지 못한 그의 항변은 그러나 세련된 그 어떤 말보다 독자들의 가슴에 깊게 깊게 메아리쳐 울린다. 세련된 형태로 다듬어내지 않은 스기하라의 대사들이 세련되지 못한 일본 사회의 울퉁불퉁한 단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분단을 다른 곳에서 아파하는 이들이 있었구나. 식민지 시절과 한국전쟁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시뻘건 단면이 아직도 세계 곳곳의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구나. 작가의 자서전적인 이 작품은 내게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한다. 한국인으로서의 나, 세계인으로서의 나,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나. 우리는 누구를 가리켜 진정 '한국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누구를 가리켜 진정 '일본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오늘(19일) 세계적인 야구대회에서 한국이 일본에게 패했다. 라디오와 TV에선 일제히 미국의 이상한 경기규칙을 질타하며 한국이 이미 일본에게 두 번이나 이겼으므로 진정한 승자는 한국이라는 메시지를 열렬히 내보냈다. 물론 일본 선수들에 대한 각종 비하의 멘트들과 함께. 이전 같으면 '전쟁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렇게 야구를 통해서 대리싸움을 하는 게 낫겠거니'하고 무심코 지나갔을 이런 해프닝들이 지금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일본에 있는 '재일'이라 불리는 한국계 일본인들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했을까. 일본이 한국에 졌을 때, 일본도 한국에 대해 엄청난 비하의 말들을 쏟아냈겠지. 그때 재일 한국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했을까.

그러나 이 책은 심각하고 어둡기만 하지는 않다. 기존의 재일 한국인 작가들이 그려냈던 어둡고 절망적인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민족문제, 분단문제, 세대갈등을 경쾌하고 코믹한 터치를 섞어 기발하게 전개해간다. 심각하게 항변하는 스기하라의 진지한 말투에 말려들어 가는가 하면 어느새 기발한 그의 상황대처에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인생에 유머로 맞설 줄 아는 이의 현명한 해학이다. 번역이 김난주라는 것도 일단 읽는 이의 마음을 안심시킨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다른 소설들을 남편인 양억관과 번갈아가며 번역했다는 것도 신뢰감을 예약해놓은 듯 설렘을 준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반드시 읽어보게 될 것 같다.

GO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북폴리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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