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베이스볼클래식 준결승 한·일전이 벌어진 지난 19일 오후 서울시청앞 광장에 펼쳐진 거리응원에서 이명박 서울시장이 시민들과 함께 응원하며 브이자를 그리고 있다.연합뉴스 심언철
한나라당이 곤혹스럽게 됐다. 진퇴유곡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 게 한나라당 처지다. 이명박 서울시장의 '황제 테니스' 파문이 불거진 지 일주일이 돼가지만 한나라당은 말이 없다. 그럴 만도 하다.
파문을 구성하는 줄기는 두 개다. 하나는 테니스장 사용료 대납 의혹. <경향신문>은 오늘자에서 모두 2600만원의 테니스료를 다른 사람이 대납했다고 보도했다. 2000만원은 이 시장과 함께 테니스를 친 선수 출신 인사가, 600만원은 서울시테니스협회 최용기 회장이 냈다고 한다.
따져보자. 한나라당은 이해찬 전 총리를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한나라당의 고발 내용에 기초하면 이 전 총리가 부산 아시아드 골프클럽에서 받은 '뇌물'은 많아야 10만원 안팎이다. 그린피 3만8000원에 식사비 수만원이다(내기 판돈 40만원까지 합쳐봤자 50만원 안팎이다). 이 시장이 대납 받았다는 테니스료에 비하면 '새 발의 피'가 아니라 '새 발톱의 피'다.
한나라당이 '안면몰수형' 정당이 아니라면 목소리 톤을 수십 배 올려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골프파문에 대해서는 한 입으로 열 마디를 하더니, 테니스파문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입은 있으되 말이 없다. 무언(無言)이 아니라 묵언(黙言)이다
한나라당이 더 곤혹스러운 건 두 번째 구성요소다. 학교용지로 지정된 서울 잠원동 땅에 시비 42억원을 들여 테니스장을 지었다. 지정용도를 피하기 위해 임시가건물 건축이란 편법을 썼지만 이 테니스장은 철골구조물이다. 임시가건물은 수명이 3년이지만 철골구조물은 최소한 60년 수명을 보장한다.
서울시의 편법 용도변경과 지방권력 심판론
편법 용도변경이 한나라당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열린우리당의 지방선거 슬로건은 '지방권력 심판'이다. 비리·부패·부실 행정으로 얼룩진 지방권력을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공교롭게도 이시장의 편법 용도변경은 이 슬로건에 딱 걸린다. 학교용지를 맘대로 전용했으니 '멋대로 행정'이고, 3년 뒤 헐어야 할 임시가건물에 42억 원의 시비를 쏟아부었으니 부실·날림행정이다.
게다가 이런 행정이 벌어진 곳이 다른 곳도 아니고 서울시다. 지방선거 최고의 상징이자 최대의 격전지에서 '지방권력 심판' 슬로건을 펼 기회를 열린우리당에 줘버렸다.
어찌할 것인가? 미국 방문일정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한 이 시장은 "사려 깊지 못했다"고 했다. 실시간으로 테니스료를 내지 않은 데 대한 사과였지만 이미 상투는 잡혔다.
사정이 이렇다면, 또 이 전 총리와 형평성을 기하려면, 한나라당은 '읍참명박'의 조치를 취해야겠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 시장은 선출직 시장이다. 본인이 사퇴를 선언하지 않는 한 어쩔 도리가 없다. 설령 사퇴를 종용한다 해도 효과가 없다. 이시장의 임기는 사실상 끝났다.
최선의 방법은 진상조사에 최대한 성의를 보인 뒤 이시장에게 적절한 처신을 요구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 또한 난감하다.
한나라당의 적극 대처는 결국 박근혜 대표의 작품으로 묘사된다. 이게 문제다. 이 시장과 박 대표는 대권 라이벌이다. 그뿐인가. 며칠 전에는 "해변가에 놀러온 사람"과 "이기주의자"가 되어 서로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박 대표가 적극 대처하면 괜한 정치적 오해를 살 수 있다. 라이벌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삼으려 한다는 오해 말이다. 그래서 갑갑하다.
한나라당은 그나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테니스 파문이 이 시장 방미 기간 중에 발생했기에 먼저 이 시장의 해명을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다. 당장 오늘 점심 때 이 시장이 기자들과 간담회를 갖는다. 이 오찬 간담회를 계기로 한나라당은 어떻게든 입장을 정해야 한다.
한나라당, 더이상 에둘러갈 길이 없다
에둘러갈 길은 없다. 속 편하게 "이 시장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라고 했다간 후폭풍이 거셀 것이다. 박 대표가 최연희 의원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가 어떤 결과를 빚었는지 모를 리 없다. 그렇게 하면 손해가 너무 크다.
손해가 그것뿐이겠는가. 4월 국회 전략이 차질을 빚는다. 한나라당은 이 전 총리의 골프파문을 지방선거까지 이어가기 국정조사를 추진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이 전략에 맞서 열린우리당이 황제테니스 국정조사 카드를 들고 나올 공산은 대단히 높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는데도 황제테니스 파문은 이시장이 알아서 풀고 우리는 황제골프 파문에만 집중하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는 순간 4월 국회는 '방탄 국회'가 된다. 본래 의도가 뭐였든 황제골프 국정조사는 황제테니스 국정조사에 대한 맞불카드로 변질된다.
리더십을 재는 가장 유효한 방법은 위기 대처력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 점에 입각해 보면 한나라당과 박 대표는 '고시급' 시험에 직면해 있다.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는 경고에도 아랑곳 않는 공천 잡음, 의원직 사퇴 촉구결의안까지 내며 압박하지만 들은 대꾸도 않는 최연희 의원, 여기에 '테니스장에 놀러간' 이 시장 문제까지 얹혀졌다. 이 삼중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다른 건 몰라도 이 시장의 황제테니스 파문에 대해서는 당장 오늘 오후 답을 내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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