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성욱 장편소설> 762년 - 18회

난파선(難破船)

등록 2006.03.24 16:50수정 2006.03.24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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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울을 사시겠습니까? 얼굴 모습이 선명하게 비칩니다."

왕신복은 그 거울을 유심히 살피며 백인 사내에게 물었다.


"생긴 모습이 독특하구나. 자네는 어디서 왔는가?"

그러자 사내가 더듬거리는 발해말로 대답했다.

"강국(康國)에서 왔습죠. 우리말로는 소그드인이라고 합니다."

강국은 고구려 사신이 그려진 아프라시압 벽화로 유명한 동서 교역의 요충지였다. 이곳 출신인 소그드인은 장사 수완이 좋아 아시아 대륙 곳곳에 펴져나가 수공업과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이곳 발해까지 그 발길이 미쳤던 것이다. 이처럼 발해는 고구려인과 말갈인 뿐만 아니라 서역인도 함께 어울려 살고 있었다. 한마디로 동북아 최대의 국제도시인 셈이었다.

시장을 둘러본 왕신복은 관청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말을 탄 전량이 급히 자신을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는 말에서 내려 왕신복 앞에 무릎을 꿇었다.


"좌윤 어른, 황상 폐하께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속히 입궐하시라는 분부이옵니다."

왕신복은 집으로 가 입궐하기 위한 관복으로 갈아입었다. 붉은 색 옷에 허리에는 가죽띠를 둘렀다. 머리는 양각(兩脚)을 위에서 묶어 상투를 만든 다음, 그 위에 건자(巾子)를 썼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도성을 지나 궁궐의 남문에 도달했다. 족히 사람 다섯 명보다 훨씬 높은 성벽도 성벽이려니와 성문 앞에 폭이 엄청나게 긴 해자(垓字 방어용 도량)가 있어 외부인은 접근할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완벽한 궁궐이었다. 섣불리 해자를 건너려고 뛰어들었다가는 한 길 깊이의 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펄펄 끓는 쇳물 세례를 받을 것이다. 왕신복은 성문 앞에서 경계를 보고 있는 군사를 향해 외쳤다.

"나 정당성 좌윤 왕신복이 폐하를 알현하러 왔소이다."

사방을 쩌렁쩌렁 울리자, 성문이 열리고 해자 위에 놓인 다리 위로 성을 지키는 군사가 마중을 나왔다. 왕신복은 궁 안으로 들어섰다. 궁의 성벽은 잘 다듬어진 방추형 돌로써 네모나게 쌓았는데 견고하면서 화려하게 보였다. 성벽의 문을 연결한 도로를 따라 궁정과 화랑, 못, 조산등 규모가 크고 화려한 건물과 시설물이 줄을 잇고 있었다. 웅장한 건물들이 평지에 겹겹이 포개져 있는 모습은 뒤의 목단강과 어울려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문왕이 집무를 보는 궐로 들어서자 지키고 있던 수비병이 고개를 숙이며 길을 비켜주었다. 왕신복은 얼굴을 들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대전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곁눈질로 대전 주위를 살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왕만이 앞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렇다면 왕과 자신만이 독대를 하는 것이다. 문득 긴장이 되었다. 정당성의 대내상(大內相)을 놔두고 그 밑의 좌윤과 왕이 독대를 하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경우에 속했다. 필시 긴요한 이야기를 할 게 분명했다.

왕의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정당성 좌윤 왕신복은 짐 앞으로 오라."

왕신복은 앉은 채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문왕은 용상에 앉은 채 근엄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붉은 색의 도룡포를 입고 머리에는 화려한 세움 장식의 금관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문왕의 얼굴은 금관의 화려함과 달리 무척 어두워 보였다. 눈 밑에 칙칙한 기운이 머물러 수심이 가득해 보였고, 얼굴빛도 붉어죽죽 해 보였다.

지난번에 왕을 알현했을 때와는 판연한 모습이었다. 왕신복은 고개를 숙인 채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중신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환관과 궁녀들도 모두 물리치고 문왕 혼자서 왕신복과 독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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