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선수들, 치매 할머니와 함께 뛰다

봄놀이 갔던 우리가 얼떨결에 5km 코스 완주한 사연

등록 2006.03.28 10:15수정 2006.03.28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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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출발준비 완료... 출발 전 기념 점퍼를 입고 '찰칵!'

출발준비 완료... 출발 전 기념 점퍼를 입고 '찰칵!' ⓒ 한성희

"우리가 같이 달립시다! 신희철 기자 어머니를 위해서!"


곽교신 기자 말에 모두 이의 없이 동의했다. 곽 기자의 이 한 마디에 '불량선수'로 남을 예정이었던 나와 박병순, 곽교신, 3명의 시민기자들이 갑자기 5km 코스를 달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지난 26일 열린 <오마이뉴스> 섬진강 강사랑 마라톤 대회에 참석했던 3명의 시민기자들은 원래 달리기에 동참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한 달 전에 10km 달리기를 신청했고 참가비 3만원을 오마이뉴스 원고료로 지불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10km는 커녕 1km도 뛸 생각이 없었다. 10km 코스를 신청한 것도 원고료로 지불하는 코스 중 가장 단거리였기 때문이었다. 달리지도 않을 거면서 신청한 이유는, 섬진강에 가서 강바람도 쐬고, 매화도 구경하고, 시민기자들과 <오마이뉴스> 축제를 즐기려는 게 목적이었다.

그냥 당일 참석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신청을 했던 것도 간다고 못박아놔야(?) 다른 핑계로 빠지지 않게 되겠지 싶어서였다. 운동이라면 소질과 취미가 동시에 없기도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에서 달리기에 공책 한 권 못 타봤던 실력이니 애당초 마라톤은 꿈도 꾸지 않았다. 솔직히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전남 곡성 섬진강에 가보랴 싶기도 했고, 아무튼 주목적은 놀고 즐기기 위한 것이다. 염불보다 잿밥에 정신이 팔린 시민기자들이었다.

전날 저녁에 도착해 마라톤 코스를 한바퀴 둘러보긴 했다. '불량 선수'로 왔지만 코스라도 봐야 할 것 아닌가. 매화가 흐드러지게 만발한 섬진강 지류 보성강 마라톤 코스를 따라 훈풍이 부는 남녘 바람을 쐬며 수려한 경관을 즐겼다.

"겁나게 멀어뿌리"라고 동네 아주머니가 가르쳐준 찜질방을 찾아 밤을 보낸 뒤,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도착한 석곡초등학교(출발지)는 농악대의 징과 꽹과리가 흥겨운 축제마당이었다. 박병순 기자와 곽교신 기자, 나는 시민기자 중 참가자를 찾아보려고 두리번거리기도 했고 열심히 몸을 푸는 프로선수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복장이 그게 뭐야?"

오연호 대표가 평상복 차림인 우리를 발견하자 어이없다는 듯 한마디 던졌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시민기자로서 참석에 의의를 둔다는 데 의기투합했고, 다같이 구경만 하는 '불량 선수'로 남기로 했으니 마라톤 복장이 아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불량선수들, 마음을 고쳐먹고 "5km 뛰자"

a "하나, 둘, 하나 둘"... 출발에 앞서 음악에 맞춰 몸을 푸는 선수들. 마라톤은 충분한 준비운동이 중요하다.

"하나, 둘, 하나 둘"... 출발에 앞서 음악에 맞춰 몸을 푸는 선수들. 마라톤은 충분한 준비운동이 중요하다. ⓒ 한성희

신희철 기자가 어머니가 앉은 휠체어를 밀면서 운동장에 나타난 순간까지 우리는 절대 뛸 생각을 안했다. 신 기자는 5km 코스를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함께 완주하려고 왔다고 했다. 우리와 말하면서도 입었던 점퍼를 벗어 행여 추울까 어머니 무릎에 덮어주는가 하면,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기분이 어떠냐, 어디가 불편하냐"고 묻는 신 기자는, 천사 그 자체였다.

가끔,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한다. 미모가 빼어난 여인, 활짝 핀 꽃, 발레공연에서 멋진 무용수 동작 등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보고 느낀다. 또한 저녁놀이 지는 바다, 눈 덮인 알프스 산의 풍광도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는다.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충족될 때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성이다.

시민기자 신희철씨가 휠체어에 어머니를 태우고 운동장에 들어선 것을 본 순간, "참 아름답구나!"하고 느낀 것은 분명 시각에서 충족된 탄성을 올릴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신 기자의 모습은 심장에서부터 감동이 오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었다. 휠체어를 밀고 들어서는 신 기자에게서 오랜만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잔잔한 감동으로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풀코스, 하프코스, 10km를 뛰는 선수들이 시간을 두고 차례차례 출발하고 나자 5km코스 차례가 됐다. 맨 앞에서 출발하자며 곽교신 기자가 휠체어를 밀고 출발지점에 모인 선수들 사이를 뚫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가게 비켜주세요" 소리 한마디에 수많은 군중 가운데 길이 쉽게 열렸다. 휠체어를 탄 어머니를 보고 박수를 치며 기꺼이 앞을 양보해준 것이다.

"자, 먼저 출발하십시오."

휠체어를 보자마자 경기 출발을 맡은 진행자가 말했다. 곽 기자에게 휠체어를 넘겨받은 신희철 기자가 힘차게 밀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만치 기운차게 달리는 신 기자의 뒤를 따라 우리도 같이 뛰었다. 화창한 봄 햇살이 모녀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출발!... 봄 햇살이 모녀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a "엄마, 갑니다!"... 다른 선수들보다 먼저 출발했습니다!

"엄마, 갑니다!"... 다른 선수들보다 먼저 출발했습니다! ⓒ 한성희

코스 길가에 차와 음료수를 제공하는 봉사자들이 신 기자 모녀를 보자 일제히 박수를 치며 응원을 했다. 어쩐 일인지 휠체어를 밀고 달리는 신 기자보다 홀로 뛰는 우리가 뒤처진다. 어머니와 달리는 것이 저리도 좋은가 보다. 우리가 같이 뛰어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뒤따라가느라고 헉헉대는 꼴이었다.

"신 기자 발에 바퀴가 달렸나보다. 저렇게 빨리 뛰다니. 헉헉"

마라톤 코스는 한가한 농촌의 맑은 공기가 대나무와 개나리와 함께 어우러졌고, 강가의 버들강아지도 흐드러지게 만발했다. 어제 차를 타고 지나치면서 본 강변 주변은 천천히 달리면서 감상하는 지금과 전혀 달랐다. 느리게 봐야 진정한 아름다움이 보이는 것인가. 보랏빛 제비꽃이 앙증맞게 피었고 한 줌씩 나온 쑥과 대나무가 무성한 낮은 산도 보였다.

반환점을 돌아 종착지 1km 전을 알리는 대흥마을 앞에 아까는 못 보던 푸짐한 식탁이 펼쳐져 있었다. 어느새 마을 사람들이 삶은 돼지고기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가는 김치, 음료수 등을 차려놓은 것이다. 농촌 마을의 푸짐하고 순수한 인심이 느껴진다. 어제 잡았다는 돼지고기는 고소하면서 뜨거워 갓 담은 김치 한 조각 걸쳐 싸서 먹는 맛이 꿀맛이었다.

a "와! 할머니 화이팅!"... 자원봉사자들의 뜨거운 박수.

"와! 할머니 화이팅!"... 자원봉사자들의 뜨거운 박수. ⓒ 한성희

a "발에 바퀴가 달렸나? 헉헉"... 신나게 달리는 모녀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 피었다.

"발에 바퀴가 달렸나? 헉헉"... 신나게 달리는 모녀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 피었다. ⓒ 한성희

석곡초교를 향해 달리던 신 기자 모녀도 멈췄다. 돼지 수육 한 점을 김치에 싸서 자신의 입에 넣을 생각은 않고 어머니 입에 먹여주는 신 기자의 얼굴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엄마 맛있어?"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신 기자는 한 점 더 어머니 입에 넣어드린다. 어머니를 돌보는 신 기자의 모습에서 미소가 떠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항상 웃는 얼굴로 어머니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보는 사람에게 참된 애정이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한다.

"어머니가 신선한 공기와 바깥바람을 쐬니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바깥바람도 좋지만 이런 행사에 참석하면 치매환자에게 사회성을 길러주는 효과가 있어요."

보행이 자유롭지 않은 어머니를 모시고 경기 용인에서 전남 곡성까지 온 이유는 이것이었다. 애완 강아지와 어머니를 돌보는 아주머니를 함께 태우고 운전해 어제 저녁 도착했단다. 외진 곳에 있는 모텔이 손님이라곤 하나 없고 달랑 신 기자 모녀 일행뿐이었다고 한다. 그럴 줄 알았다면 겁나게 먼 찜질방 찾느라 고생하지 않고 같이 투숙하는 건데.

스산한 모텔에서 밤새 강아지가 우는 바람에 무서워서 잠을 설쳤다며 '귀곡산장' 경험을 들려주는 그녀의 얼굴은 잠을 못 잔 사람의 피곤함은 찾아볼 수 없이 싱싱했다. 어머니가 피곤할까봐 10km를 달리려다가 포기했다는 그녀는 다시 기운차게 출발점을 향해 달렸고, 우리는 또 다시 헉헉대며 뒤따라갔다.

완주... 메달을 주는지도 처음 알았다

a 모녀의 영광... 영광의 완주메달을 목에 걸고 기뻐하는 신희철 시민기자와 어머니.

모녀의 영광... 영광의 완주메달을 목에 걸고 기뻐하는 신희철 시민기자와 어머니. ⓒ 한성희

완주를 끝내고 운동장에 무사히 도착하자 신 기자는 코스를 완주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완주메달'를 찾으러 가야 한다고 두리번거린다. 난 불량선수답게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녀 덕분에 시민기자 불량선수들까지 마라톤 5km 코스를 완주했다.

두 개의 완주메달을 받아든 신 기자는 어머니 목에 정성스럽게 걸어주고 자신도 목에 걸었다. 모녀사랑 마라톤 완주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열었다.

"엄마 웃어요. 이거 메달 보여주면서요, 응?"

활짝 웃는 그녀를 따라 어머니도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치매 어머니의 사회성을 길러주고 자부심을 갖게 하려고 참석한 모녀는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그 효과가 크게 작용해 어머니 병세가 호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부녀회원들이 정성껏 준비한 두부, 맛있는 김치, 깍두기 등을 놓고 떡국으로 점심을 먹었다. 그녀는 뜨거운 떡국을 호호불어 식혀서 어머니 입에 한 숟갈씩 떠 넣어준다.

"맛있지? 한 입 더 먹어요."

점심을 다 먹고 난 뒤 그녀는 가봐야겠다며 먼저 일어섰다. 어느새 선글라스를 쓴 멋쟁이 어머니를 태운 휠체어를 밀며 "가는 길에 매화를 보고 갈게요" 인사를 남겼다. 매화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 그녀 자신보다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마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a "엄마 맛있지?"... 석곡 부녀회원들이 정성껏 준비한 두부, 맛있는 김치, 깍두기 등을 놓고 떡국으로 점심을 먹었다.

"엄마 맛있지?"... 석곡 부녀회원들이 정성껏 준비한 두부, 맛있는 김치, 깍두기 등을 놓고 떡국으로 점심을 먹었다. ⓒ 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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