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생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작은 섬

[섬이야기33] 살아 있는 섬 생활사 박물관, 전남 신안군 암태면 추포도

등록 2006.04.03 16:09수정 2006.04.03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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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곡리 고개를 넘자 앞에 넓은 갯벌이 드러났다. 대여섯 명의 아낙들이 밭을 일구듯 넓은 갯벌을 뒤집고 있다. 낙지를 잡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게를 잡기에는 뻘이 너무 깊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갯벌에 몸을 의지하고,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갯벌을 파내는 일이 여간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한걸음을 옮길 때마다 뒤뚱거리며 발을 떼고 그릇을 앞쪽으로 밀어 놓은 다음 작업을 반복한다. 뭐가 잡힌 모양인데 낙지나 게는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벌교의 갯벌처럼 뻘배를 타고 고막을 잡거나 맛조개를 뽑는 것도 아니다. 조심스럽게 뻘에서 잡아내 그릇에는 담는 것은 갯지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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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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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노두 '뻘 치는 일'은 섬에서 제일 큰일

추포도는 하나의 섬이지만 원래 북쪽의 포도(浦島)와 남쪽의 추엽도(秋葉島), 동쪽의 오도(梧島) 3개로 분리됐다. 1965년 방조제를 쌓아 간척답(干拓畓)과 염전이 개발되면서 하나의 섬 추포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방조제가 막아지기 전까지 포도에서 오도로, 추엽도에서 오도로, 그리고 다시 오도에서 본섬 암태도 수곡리로 이어지는 노두가 있어 건너다녔다. 방조제가 막아지고 나서도 징검다리의 노두길은 오도에서 암태까지 30여년 계속 되었다.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울력'으로 하는 '뻘치는 일'은 1997년 시멘트로 포장되기 전까지 추포도에서 가장 큰 일이었다.

이곳 주민들은 음력 7월 조금 노두를 관리하는데, 이를 '뻘을 친다'고 말한다. 노두를 관리하는 일은 6000여개의 자연석을 뒤집어 이끼가 끼는 것을 방지하고 돌이 움직이지 않도록 갯벌 흙을 모아주는 일을 말한다.

이 시기에 뻘을 치면 흙이 돌덩어리처럼 단단해지기 때문에 노둣돌이 움직이지 않고 튼튼하다는 것이 추포리 문천수 이장(47)의 말이다. 뻘을 치는 일도 1998년 시멘트포장공사가 시작되면서 중단되었고 2000년부터는 자동차를 타고 암태도에서 추포도로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길이 열렸다. 시멘트로 포장된 길로 바뀌었지만 주민들은 아직도 그 길을 '노두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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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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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노두가 언제 처음 놓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수곡리에서 추포도로 들어오는 길목에 오도와 추엽도로 연결되는 방조제 오래된 공덕비가 하나 서 있다. 이 공덕비 '路道碑'이라는 선명한 기록과 함께, 주요 시주자들인 '장씨', '문씨', '김씨'의 이름이 적혀 있다.

내용으로 보아 노두길을 개보수하는데 큰 시주를 한 공덕을 기념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데, 같은 비가 포도리도 있었지만 유실되었다고 전한다. 이 비문에는 이장 문씨의 6대조 어르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과 병인년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1800년대 초반에 노두가 개보수 된 것으로 추정된다.


갯벌 한복판으로 포장된 2.5km의 노두길을 건너자 소금밭이 눈앞에 펼쳐진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소금을 내기 위해 어민들의 손길이 바쁘다. 추포도에는 모두 일곱 판의 소금밭이 있다. 몇 년에 한 번씩 소금밭을 갈아주고 다져줘야 좋은 소금을 얻을 수 있다.

겨우내 무너진 자구도 손질하고 염판도 보수하며 소금을 기다리고 있다. 추포도는 암태도에 딸린 작은 섬이지만, 안으로 들어오면 상황이 다르다. 염전과 논밭은 물론 해수욕장이 있고, 작고 아담한 초등학교가 반듯하다. 마늘과 보리가 갯벌과 어울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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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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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150여명이 넘던 학생이 12명으로 줄어들었다

포도리에서 추엽리로 넘어가는 길 사이에 있는 암태초등학교 추포분교는 12명의 학생과 3명의 선생님이 있다. 늘 폐교의 위험에서도 주민들의 학교사랑으로 지금껏 유지되고 있다. 시골학교가 그렇듯 어렵던 시절에 시멘트와 철근만 지원받았을 뿐, 부지는 주민들이 마련했고 손수 학교를 지었다. 지금의 학교운동장 천연잔디도 주민들이 직접 심은 것들이다. 학교화단, 교문 앞길, 배구장 등 곳곳에 주민들의 땀이 배어 있다.

이 작은 분교도 한때 150여명의 학생들로 북적였던 적이 있다. 1970년대 중반 어촌새마을운동이 시작될 무렵 염전개발이 시작되었다. 이미 비금, 증도, 신의 등 신안지역에서 소금이 한창 나오던 시절 안좌의 자라도 사람들이 추포도에 염전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염전 한판이면 서너 집이 붙어서 소금농사를 짓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작은 섬이지만 젊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개발되기 전까지 추포도에는 큰목개에 두 판의 염전이 있다. 염전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이 들어오고 젊은 사람들도 떠나지 않고 섬을 지키면서 학생수가 150여 명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후 소금 시세가 떨어지면서 학생 수도 줄어들었지만, 1980년대 중반 무안 해제 인근 사람들이 들어와 김양식을 시작하면서 젊은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 시기는 완도에서 시작된 김양식이 서남해안을 따라서 북상하던 시기였다. 다른 지역에 비해서 늦게 시작된 추포도 김양식은 초기 추엽리와 포도리 집집마다 대부분 40-100척 규모로 양식을 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양식기술이 발달하지 않고 사람의 노동력에 의존했던 시절이었기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필요했다. 이후 가공공장이 들어서면서 젊은 사람들의 일거리가 사라지고 양식기술도 발달해 대규모화 되면서 지금은 10여명이 수백 척 규모의 김양식을 하고 있다.

추포도 주민들의 교육열은 대단하다. 한 주민은 아이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기 위해 토요일과 일요일 주말에 목포로 보내기도 했다. 일종의 주말반 피아노 레슨인 셈이다. 암태도에 학원이 없었을 때는 학원을 보내기 위해 목포에 있는 중학교에 보내기도 했지만, 최근 본섬에 학원이 생기면서 목포에서 본섬으로 중학교를 보내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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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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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갯일보다 농사일에 익숙한 주민들

섬 동쪽으로는 염전과 논 그리고 갯벌이 발달해있고, 남쪽으로는 김양식이, 서쪽으로는 해수욕장이 발달해 여름철에는 적지 않은 해수욕객들이 찾고 있다. 추포도는 산지가 많은 지형이나 농사가 활발하여 쌀·보리 등의 주곡을 자급할 정도이다.

특히 추포도 인근 바다는 서남해의 황금어장으로 알려진 곳이지만 어업활동은 매우 부진하며, 주변의 얕은 바다와 간석지를 이용한 소수의 전복양식과 김 양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넓은 갯벌을 활용한 생업활동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낙지잡이나 갯지렁이 잡이도 인근 팔금사람들이 하고 있을 정도이다. 본섬인 암태도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당사도의 김양식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바다 소득이 없는 해변산중으로 통한다.

한때 어촌계에서 갯지렁이 잡이를 해보려고 시도했지만 나서는 주민들이 없어 무산되기도 했으며, 넓은 갯벌에서 이루어지는 가래를 이용한 낙지잡이를 할 수 있는 주민도 두세 명에 불과하다. 염전과 김양식 등으로 젊은 사람들이 본섬에 비해서 많은 편이지만 아내들이 외지에서 들어온 탓에 굴작업 등 갯일에 익숙하지 않아 자원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장 문씨 부부의 지적이다.

"우리마을은 대부분 외지 사람들이 들어왔어요. 시집을."
"이쪽이 친정인 사람들은 굴을 주전자로 하나씩 하는데 우리는 지루한께 못해요."
"마을에 낙지 팔 줄 아는 사람이 정해져 있어요. 저도 몰라요. 우리 동네에서 낙지 팔 줄 아는 사람은 세 명이나 되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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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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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주민들도 이렇게 갯일에 나서지 않았던 것은 80년대 김양식으로 '김 돈'을 만져본 탓에 갯일을 통해 '몇 푼'씩 버는 것에 나서지 않는다. 팔금사람들은 하루 갯지렁이를 잡아 4-5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추포도 주민들이 갯일을 생업으로 했다면 인근 마을주민들이 마을어장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포도는 작은 섬이지만 해수욕장, 갯벌, 염전, 양식어장 그리고 논과 밭 등 섬에 살림살이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이장 문씨는 암태도 수곡리에서 추포도로 이어지는 노두길의 복원을 꿈꾸고 있다. 그는 마을은 물론 암태도를 비롯 인근 섬까지 기웃거리며 버려진 조상들의 흔적을 모우고 있다.

그의 마당에는 신안에서 두 개 밖에 없다는 들돌과 여러 개의 확돌들이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추포도에 어촌민속박물관을 꿈꾸고 있는 모양이다. 노두길을 복원하여 '노두체험'은 물론 갯벌체험 그리고 염전과 해수욕장을 이용한 '어촌관광' 마을을 기대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라도닷컴'의 '김준의 섬섬玉섬'에도 보내집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라도닷컴'의 '김준의 섬섬玉섬'에도 보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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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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