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인간들만 국경을 만들어...

시인이 따라간 섬진강, 530리 (5)

등록 2006.04.03 17:51수정 2006.04.03 17:52
0
원고료로 응원
하늘에서 보면 아무 경계도 없는 땅 위에다가 서로 철조망을 세워두고 으르렁대는 우리들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울까? 무위자연(無爲自然) 속에서 자신을 속박하는 그 모습이 저 무한대의 우주 속에서나, 요즘 유행하는 '그분'이 보신다면 얼마나 한심할까?

적과 적이 서로 겨루고
원수끼리 물고 뜯으며 싸운다 한들
못된 마음이 저지르는 해로움보다는
그래도 그 영향이 적을 것이다.



"마음은 본래 자유로운 것"이라고 수많은 철인들은 노래했다. 새들은 허공을 마음대로 날아갔다 날아오고, 강물은 또 거침없이 하루에도 수천 리를 흘러가는데, 인간만이 가장 자유스러운 자연 속에다가 국경이라는 울타리를 쳐놓고 세계는 서로를 죽이면서 반목하며 산다.

오직 정글의 법칙만이 통용되는 이 무잡한 시대에, 힘 있는 나라들은 자기들에게만 통용되는 우스운 법을 만들어 놓고 근엄한 얼굴로 서서 브리핑을 한다고 하니, 개미처럼 허리가 가늘어 질 지경이다.

강대국들이 수십 만 명을 죽이는 것은 평화유지 차원이고, 힘없는 나라 백성들이 하는 것은 테러라고 우긴다. 오폭으로 마을 하나가 쑥대밭이 되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죽거나 다쳐도 언급이 없다가, 자기 나라 병사 한 명이라도 잡히면 이것은 세계적인 뉴스거리니, 동물의 법칙만이 통하는 시대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얼마나 많은 통치자들이 그 웃음거리 같은 명분을 내세워, 이 인류를 죽음 속으로 몰아넣는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채.

요즘에는 중국에서 인삼 키우는 방식이 좀 변했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않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중국산 '보이차' 때문에도 또 한 번 곤욕을 치르고, 입원까지 한 적이 있다. 원래 보이차란 자기 대(代)에 먹는 것이 아닐 것이다. 집의 기초를 닦을 때 소중한 마음으로 그 터에 묻어놓고 나중에 운 좋은 후손들이 그 차를 먹거나, 정말 차를 제대로 아는 사람을 만나서 이 세상에 아름다운 향기 한 번 피워보라는 것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 선업(善業)을 많이 쌓은 사람들이 만나게 되기도 하고. 그러나 요즘에는 제대로 숙성시킨 차(茶)를 만나기도 어려울 뿐만이 아니라, 비싼 돈을 주고도 거의 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경제 제일주의만 부르짖고 배금주의로 치닫다 보니, 그 질이 아주 나쁜 것들이 많다고 한다. 아예 상도(商道)도 없고, 정도도 없는 천박한 장사꾼들만 양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증기로 쪄서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하다거나, 인체에 치명적인 성분들을 넣어 사람들을 병원에까지 입원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먹는 먹을거리로 장난을 치는 모습을 어디 우리가 한두 번 보았는가. 국민들은 이제는 면역이 되어 별로 놀라지도 않는 것 같다? 무게를 늘이기 위해 게의 뱃속에다가 납을 집어넣고, 살아있는 소에다 억지로 물을 먹여 죽이고 그대로 냉동시켜 무게를 늘이고. 얼마 전의 김치의 기생충 파동. 여기에다가 선진국들의 유전자 조작 농산물, 호르몬을 교란시킬 수 있는 사료를 먹은 소….


그래서 요즘 시골 하천들이, 특히나 소 몇 마리 키우는 목장이 있는 마을로 들어서면 악취 때문에 들어가기가 힘들 지경이다. 이러다가 정말 우리 소 키우는 농가들이 혐오시설이 될 것만 같다. 어디 우리네 옛날 농촌이 그랬는가. 마을에 들어서면 질경이 풀 위로 여기저기 소똥이 떨어져 있었고, 그러면 조무래기들은 밟을세라 조심조심 피해가던 그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구수한 시골의 한 정취였지 않았는가.

지금도 동남아의 많은 국가에서는 소똥을 아주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것을 잘 말려서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있는 연료로 사용하거나, 또 벽을 바르는 데도 사용된다. 그리고 송아지의 첫 똥은 우황이라고 하여 사경을 헤매는 사람도 살린다는 명약 중의 명약이 아닌가.

옛날에는 학교 끝나고 대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할아버지의 호령소리에 소를 데리고 방죽에 나가 먹이를 먹이거나, 꼴망태 한 짐 가득 깔(꼴)을 베어와 소도 먹이고 토끼도 먹였다.

그러나 강을 따라 걸어가고 있는 지금 이 시간. 시골 언덕에는 어디에도 깔베는 소년은 보이지 않고, 더더구나 아이들의 그림자도 없다. 들판에 소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그 쓸쓸한 풍경 뒤로, 농로를 따라 트렉터 한 대만 요란하게 지나간다.

아 낮술 한 잔 하고 싶은 시간.

저 들판에 질펀하게 엎드려 함평 천지나 해남 어디쯤에 사는 시골 촌놈들 몇 불러다가, 막걸리 몇 사발에 노래 몇 소절 멋들어지게 부르고 싶다.

a 이제 점점 개울들이 넓어진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서 처음으로 계곡다운 계곡이 보이는 것 같다.

이제 점점 개울들이 넓어진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서 처음으로 계곡다운 계곡이 보이는 것 같다. ⓒ 윤재훈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되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을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것

그곳을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잡으려
풀섶 이슬이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곳을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을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을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어찌 이렇게 우리 산천이 아름다운가. 옛 시골의 정취를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려나간다. 그림을 보듯 정확하고, 아련하게 묘사해내는 이 놀라운 세공력. 윤동주 시인의 시구처럼 "풀냄새가 물큰 향기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칠 것만 같다."

a 옆으로 난 오솔길을 약간 오르자 수많은 구도자들이 앉아 있는 것 같은 풍경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전부 삿갓을 뒤집어쓰고 삼매에 들어 있다.

옆으로 난 오솔길을 약간 오르자 수많은 구도자들이 앉아 있는 것 같은 풍경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전부 삿갓을 뒤집어쓰고 삼매에 들어 있다. ⓒ 윤재훈

왜, 걷는가?

비장한 각오로 명퇴를 결심하고 격포 시대를 지나, 지금은 섬진강가에서 홀로 매화의 매운 절개와 벗하고 계실 송수권 시인의 시 한 편이 떠오른다.

물염정시(勿染亭詩)

-판치생모(板齒生毛)란 화두에 답함*


화순 적벽 물염정(勿染亭)
홀아비 꽃대처럼 서서 그 생각 했을까
동복 수원지를 거쳐 무등산 자락을 넘어오다
그 생각 했을까

청풍리 쉼터,
쉰밥 같은 나이
오십칠 세로 요절한 김삿갓 시비 앞에서
그 생각 굳어졌을까
돌도 삿갓을 쓰는 세상이라니!

육십오 세 정년까진 아직 짱짱한 나이인데
오늘은 명퇴로 직장을 물러나와 서해 짠 노을 속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섰다
소주 위의 소주, 소주병도 삿갓을 쓰고
바람을 일으키는 세상인데
나라고 왜 삿갓을 못 써?
삼거리 주막집 돼지 머리고기 국밥을 말다
그 생각했을까

김삿갓처럼 떠돌이가 되긴 아직 이르고
헛제사밥 같은 시를 위해 손발을 묶기엔
나는 아직도 미련이 많다

*판치생모(板齒生毛): 엉덩이 썩은 줄 모르고 용맹정진하는 것.


주인은 보이지 않고 벌도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적막한 산속에서,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각오로 대오(大悟)를 기다리는 눈 어두운 스님 같다. 갑자기 젊은 날 내 가슴을 울리던 한용운 선사의 <오도송> 구절이 떠오른다.

남아는 어디나 고향인 것을
객수로 보낸 생 그 얼마인가
한 마디 버럭 질러 삼천대천세계 깨우니
물 속에 붉은 꽃만 분분히 떠간다.


오래되어서 잘 맞는지 모르겠다. 그래, 도(道)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좀 어리숙하게 보여도, 따뜻해야만 만물을 품을 수 있지 않겠는가. 저 선가(禪家)의 혜능대사가 어디 많이 배워서 법통을 이었는가. 학교 문 앞에도 가본 적 없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답답해 보일지 몰라도, 평생 용맹정진 하다 보면 지금처럼 따뜻한 어느 봄날, 문득 깨치지 않겠는가.

"끽다거(喫茶去)"나 조주선사의 "뜰 앞에 잣나무"가 무에 얼마나 큰 소리가 나는가. 눈 밝은 척 날카로운 눈으로 중생들을 바라보는, 좀 배웠다 하면 그 허접쓰레기 같은 조그만 지식들을 법어처럼 남발하는, 과대 포장자들이나 속빈강정들이, 이 시대에는 얼마나 많은가.

a 그러나 사람들의 그림자는 여전히 없다. 집 옆에 딸린 코딱지 같은 가게에는 담배도 없고, 우표도 팔지 않고, 주인 노파도 없고, 거미줄을 투과한 봄 햇무리만 아련하게 일렁인다. 빨간 우체통 하나 소녀처럼 외롭게 걸려있고.

그러나 사람들의 그림자는 여전히 없다. 집 옆에 딸린 코딱지 같은 가게에는 담배도 없고, 우표도 팔지 않고, 주인 노파도 없고, 거미줄을 투과한 봄 햇무리만 아련하게 일렁인다. 빨간 우체통 하나 소녀처럼 외롭게 걸려있고. ⓒ 윤재훈

a 굳게 닫힌 문들 사이로 그래도 사람들은 사는지 장작만은 풍성하다.

굳게 닫힌 문들 사이로 그래도 사람들은 사는지 장작만은 풍성하다. ⓒ 윤재훈

a 마을에 들어서자 오래된 다리 하나.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던 옛 시절의 추억만을 간직하고 있는지, 길마저 끊어져 지나가는 길손의 마음을 더욱 외롭게 만든다.

마을에 들어서자 오래된 다리 하나.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던 옛 시절의 추억만을 간직하고 있는지, 길마저 끊어져 지나가는 길손의 마음을 더욱 외롭게 만든다. ⓒ 윤재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약 5년여 세계오지 배낭여행을 했으며, 한강 1,300리 도보여행, 섬진강 530리 도보여행 및 한탄강과 폐사지 등을 걸었습니다. 이후 80일 동안 5,830리 자전거 전국일주를 하였습니다. 전주일보 신춘문예을 통해 등단한 시인으로 시를 쓰며, 홍익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추석 때 이 문자 받고 놀라지 않은 사람 없을 겁니다 추석 때 이 문자 받고 놀라지 않은 사람 없을 겁니다
  2. 2 최근 알게 된 '평생직장', 정년도 은퇴도 없답니다 최근 알게 된 '평생직장', 정년도 은퇴도 없답니다
  3. 3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4. 4 아직도 '4대강 사업' 자화자찬? 이걸 보고도 그 말 나오나 아직도 '4대강 사업' 자화자찬? 이걸 보고도 그 말 나오나
  5. 5 우리 모르게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왜? 우리 모르게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