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404회

등록 2006.04.06 12:27수정 2006.04.06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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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성(山西省) 북쪽 끝에 위치한 백가촌(百家村)에는 나이를 도저히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연로한 한 노인이 들어와 머문 지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백가촌에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노인을 존경하고 있었다.

백가촌(百家村)의 촌장인 공손벽(公孫蘗) 역시 마을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매일 아침 그 노인을 찾아가 문안을 드리곤 하였다. 그가 노인에게 대하는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극진했다. 마치 돌아가신 부친을 대하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욱 극진하게 대접했다.


오늘도 역시 공손벽은 옷매무새를 정갈히 하고 노인이 머무는 모옥으로 다가갔다. 지은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볼품없는 초라한 모옥이었다. 그는 문 앞으로 다가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 벽입니다."

오십이 다 되어 가는 나이임에도 공손벽의 태도는 어려운 스승을 모시는 듯한 태도였다. 안에서 마른 기침소리가 들렸다.

"쿨럭...... 어서 드시게."

목소리는 쇠잔했고, 무언가 목에서 걸리는 듯 목소리가 명확하게 이어지지 않았다. 안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이제야 일어난 모양이었다. 공손벽은 주저하지 않고 방문을 밀고 들어갔다.


"소생이 하겠습니다."

방 안이라 해 보았자 겨우 서너 사람 들어서면 더 이상 앉을 곳이 없을 정도로 좁았다. 한 쪽에 침상이 놓여져 있고, 조그만 탁자와 그 위에 놓여져 있는 다기(茶器) 정도가 전부. 이불을 접는 노인을 보고 한 말이었다.


"아니야... 아직 이 늙은이가 할 수 있다네."

노인은 왜소했고, 정말 나이를 추측할 수 없을 만큼 노쇠했다. 얼굴에는 검버섯이 뒤덮고, 허리는 구부정했다. 이불을 개는 두 손 역시 검버섯이 피어 있었고, 뼈에 가죽을 입혀 놓은 듯 너무 말라 있어 조그만 충격에도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어르신께서 주무시는데 소생이 너무 일찍 들른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노인은 이불을 침상 한 켠에 개어 놓고는 얼굴을 씰룩거렸다. 그것은 웃는 것이었는데 너무 깡말라 있어 웃는 것이 아닌 찡그리는 것 같았다.

"아니야...... 요사이 점차 아침에 눈이 떠지지 않는다네... 갈 때가 다 된 모양이야."

노인네들의 거짓말은 언제나 한결 같다. "빨리 죽어야지"라든지 "이제 갈 때가 되었어"라든지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것이 대개 젊은 사람들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무기가 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면서 말이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어르신께서는 아직 젊은 사람들보다 정정하십니다."

예의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이 말을 해야 한다. 입에 발린 소리라 하겠지만 멍청스럽게 노인네들의 그런 말에 맞장구를 쳤다간 두고두고 원망을 듣게 되는 것이다. 공손벽은 빙긋이 웃으며 탁자로 다가갔다. 주저없이 옆에 꺼져가는 화로에 불씨를 살리고 물을 끓였다.

품속에서 깨끗한 천을 꺼내 찻잔을 닦기 시작했다. 이것은 공손벽이 매일 아침 하는 일이었다. 그는 찻물을 끓이고 다기를 닦고 나서는 노인에게 차를 올리는 것이다. 첫 잔은 물을 조금 부어 잔을 가시듯 마시고, 두 번째 물을 부어야 제대로 우러난 차가 제 맛을 낸다.

노인은 앙상한 손으로 얼굴을 쓱쓱 비비고는 공손벽의 맞은편에 앉았다. 탁자에 공손히 놓은 찻물이 옅은 노란 빛깔을 띠고 있다. 찻잎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것으로 보아 좀 더 시간이 지나야 제 맛을 낼 터. 노인은 입김을 후후 불어가며 한 모금을 넘겼다.

"촌장의 표정이 오늘따라 어둡구먼. 하기야 나 같은 떠돌이 늙은이까지 촌장의 심기를 성가시게 하니 그럴 만도 하지."

이 때도 예의바른 사람이라면 대답을 잘해야 한다. 노인네들은 어린애와 같다. 모든 것을 자신의 시각에서 자신과 연관하여 보기 때문에 끊임없는 관심을 보여주어야 안심을 하는 것이다.

"소생이야 어르신을 이렇게 가깝게 모실 수 있다는 것이 영광이지요. 제 유일한 낙이 되었습니다."

"백가촌이 아니라 만가촌(萬家村)으로 바꾸어야 할 정도로 촌락이 늘어났으니 촌장의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신경 써야 할 일도 많고..."

공손벽은 슬며시 미소를 흘렸다. 이 어르신은 분명 자신의 고민이 무엇인지 아는 분이다. 그것을 모른 체 하고 다른 말만 하고 있다. 그가 촌장을 맡은 이후로 계속 제기된 이 문제에 대해 분명히 복안을 가지고 계실 텐데 지금까지 아무런 말씀도 내리지 않는다. 몇 번이고 슬며시 떠 보았지만 뚜렷한 말씀이 없다.

오늘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온 것은 오늘만큼은 해답을 얻기 위해서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르침을 받으려는 것이다.

"이미 아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무얼...?"

"더 이상 막기가 힘듭니다. 젊은 아이들은 이미 마음이 중원에 가 있습니다."

노인은 딴청을 부리다 공손벽이 정색을 하며 말하자 차를 들다말고 공손벽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미 노인의 눈가는 짓물러져 진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번지고 있지만 눈만큼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심연하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자네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고...?"

공손벽은 내심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노인의 말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이성은 아니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외진 곳에 살지 않을 정도로 이제는 힘이 있었다.

"반드시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허나..."

"결과를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겠지."

"어려운 일입니다. 성공을 한다 해도 많은 피를 흘릴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네가 왜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가? 혹시나 하는 요행 때문에...?"

공손벽은 부끄러웠다. 이 노인의 앞에 있으면 자신의 속내가 모두 벗겨진 느낌이었다. 공손벽은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께서 이제는 가르침을 주십시오."

노인은 손으로 눈을 비볐다. 자꾸 진물이 흘러 시야를 가렸다.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 이 일 때문에 편히 죽지도 못하고 이곳에 머문 지 구 개월 여. 이제는 결정해야 할 시기다. 노인은 천천히 음미하듯 차를 마셨다. 공손벽이 다시 찻잔에 차를 따랐다.

"정면으로 부닥쳐 해결할 수 없다면 한 번쯤 반대로 생각해 보게. 왜 자네는 막으려고만 하는가? 젊은이들의 생각대로 사고를 해보게. 그러면 명확한 대답이 나올 것이네."

"나중 일은 생각도 하지 않고 뛰쳐나가려는 아이들의 생각이란 뻔한 것이 아닙니까? 청운의 꿈을 품은 그들로서는 당연히 이 외진 곳이 답답하기도 하겠지요. 자칫하면 그들의 피가 헛되이 중원에 뿌려질지 모르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단순히 그들의 생각을 치부해 버리지 말게. 그렇다면 만족할 만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네. 그 아이들이 이곳을 나가려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겠지.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 헛되이 피를 흘리지 않겠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을 것이네."

"소생이 어찌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있겠습니까? 소생도 이미 들은 바가 있습니다. 이미 신주귀안(神珠鬼眼) 어르신도 이곳을 다녀가신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분들과 과거와 똑같은 전철을 밟고 계십니다."

"속단하지 말게. 아직 신주귀안은 움직이지도 않았네."

"오래전부터 천동(天洞)의 존재를 알고 계시는 유일한 분이 어르신이 아니십니까? 그들의 의도를 아시고 그 잘못됨을 바로 잡으시려 노력했던 분이 어르신이 아니십니까? 헌데 어찌하여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까?"

공손벽은 답답한 표정으로 따지듯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작가가 오늘부터 중국 출장입니다. 바쁜 오전 시간을 보내느라 올리는 시간이 조금 늦었습니다. 출장 중에도 연재는 쉬지 않을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덧붙이는 글 작가가 오늘부터 중국 출장입니다. 바쁜 오전 시간을 보내느라 올리는 시간이 조금 늦었습니다. 출장 중에도 연재는 쉬지 않을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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