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405회

등록 2006.04.07 08:57수정 2006.04.07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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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노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 외진 벽지에 있으면서도 공손벽은 중원을 읽고 있었다. 그것은 그 역시 중원으로 나가려는 마음이 진작부터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을 막으려 하신 어르신의 노력에도 결국 이리되지 않았습니까? 구파일방이 문을 닫아 걸고 전전긍긍하는가 하면 철혈보마저 무너졌습니다. 중원에는 지금 혈풍(血風)이 불고 혈해(血海)가 흐르고 있습니다."


노인은 입속의 찻물을 우물거리다 이윽고 입을 떼었다.

"막으려 하기 보다는 설득하려 했네."

"그러시다 결국 귀곡(鬼谷)의 후계를 이을 제자 분까지 잃으시지 않았습니까? 아무 말씀도 없이 소생마저 그렇게 되길 바라십니까?"

노인은 다시 입을 닫았다. 세상사 이치(理致)를 꿰뚫고, 천기를 짚어 안다 해도 만사(萬事)가 생각한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그 아이의 뜻이었다. 심성이 곧고, 마음이 넓은 아이였다. 상대를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했고 이해하려 했다. 그 아이는 모용화천을 설득하려 했다. 모용화천을 믿었고 결국 죽었다.

"자네는 천동이 이 세상을 뒤집을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중원에 퍼져있는 본교의 힘… 그것이 결집되어 돕는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국 공손벽의 마음에 있는 미망(迷妄) 때문이다. 그러기에 공손벽이 갈등을 겪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주장에 밀려 그러는 것만도 아니다. 공손벽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늙은이는 요사이 가끔 꿈을 꾼다네. 마지막 거두어들인 그 여아… 손녀 같았던 그 아이가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네."

왜 갑자기 엉뚱한 화제를 꺼내는 것일까?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리고 노인은 허전하고 외로운 것 같았다.

"어르신과 같이 와 마을 어귀에 머무는 송윤(宋胤)이란 청년의 동생이라 들었습니다."

"허… 자네는 모르는 게 없군."

"적어도 백가촌에 머무는 분들이라면 소생이 반드시 알아야 하지요."

"그 아이는 지혜롭고 맑은 심성을 가지고 있다네. 할아버지인 송렴대학사를 닮은 듯 하지. 더구나 매우 아름답기도 하다네."

"……?"

"허나 미인은 박명(薄命)이라… 그 아이는 요절할 상이네. 드디어는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네. 이 늙은이가 보기에 올해를 넘기기 힘들지. 그래서 슬프다네."

공손벽은 노인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천기를 읽고 바꿀 능력이 있는 노인이었다. 비록 보기에는 늙고 초라해 보이지만 호풍환우(呼風喚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노인이었다. 그런 노인의 입에서 아끼는 제자의 단명을 슬퍼하는 말이 나오다니….

"운명은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본래 타고난 대로, 정해진 데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거나 불가능하다면 어떠한 노력도 필요 없는 것이지요."

"자네 말이 옳으이… 바로 그것이네."

노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공손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허나 운명은 자신만이 바꿀 수 있다네. 타인이 아무리 바꿀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 해도 자신이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바뀔 수 없는 것이지. 타인은 단지 바꿀 수 있는 계기를 주거나 기회를 제공하는 것뿐이네."

공손벽은 갑자기 멍해졌다. 분명 노인은 화두를 던지고 있는데 받아들이는 자신의 머리 속은 정리가 되지 않고 헝클어져 있다. 그 순간 다시 이어지는 노인의 말에 둔기로 뒤통수를 맞는 것 같은 충격이 밀려들었다.

"자네의 운명이 백가촌의 운명과 같다면 자네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지 않겠나? 자네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바꿀 것인지 생각해 보게나."

공손벽은 한참이나 멍한 상태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역시 미망이었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홀려있었던 미망. 초라한 백가촌을 일구어낸 그에게 다른 어떤 운명이 있을까? 그저 백가촌은 자신의 운명과도 같은 곳이었다.

자신이 사로잡혀 있던 혼돈의 안개 속에서 길을 찾은 것도 같았다. 그는 한동안 그렇게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장사를 배우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공손벽의 음성은 나직했지만 또렷했다. 노인은 공손벽이 미망에서 깨어났음을 알았다.

"아주 좋은 생각일세."

억지로 젊은이들의 꿈을 접게 하면 안 된다. 억누르기만 하면 안 된다. 끓어오르는 그들의 정열과 꿈을 발산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허나 손에 칼을 쥐고 중원으로 나서면 안 된다. 영원한 승자는 없다. 장사를 하다가 실패하면 돌아올 곳이라도 있지만 칼을 쥐고 나갔다 실패하면 돌아오지 못한다.

공손벽은 남은 차를 모두 마셔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고 고개를 숙였다.

"내일 아침에는 좀 늦을지 모르겠습니다."

노인은 씰룩거리며 웃었다. 오랫동안의 기다림이 이루어졌다. 모든 것은 가르치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비록 배워서 승복했더라도 언젠가 후회는 남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나중에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스스로 느끼고 깨달은 후에 스스로 결정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 늙은이는 늦잠을 잘 수 있겠군."

노인은 허허로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다 문득 방문을 열고 나가는 공손벽의 등을 향해 말을 던졌다.

"송윤이란 아이에게 이 말을 전해 주게. 귀곡으로 돌아가라고…."

공손벽이 몸을 돌렸다.

"그냥 돌려보내도 되겠습니까? 중원이 저 지경인데…."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 늙은이가… 그리고 귀곡이 할 일은 여기까지네. 억지로 막는다고 막아지는 일도 아니고, 말린다고 그만둘 일도 아니네. 사람의 일이란 가끔 하늘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네. 아마 잘 될 거야. 비가 온 후 땅이 굳는 법이니까…."

공손벽은 피식 웃었다. 그로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송윤이란 청년에게는 어르신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을 작정이십니까?"

"사람이 늙으면 게을러진다네…."

그 말에 공손벽은 선뜻 몸을 돌리지 못하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갑자기 방문 앞에서 삼배를 올렸다. 그것은 부모나 사부를 모시는 태도. 허나 끝내 말을 하지 않고 뒷걸음을 쳐 물러나다가 그곳을 떠났다. 아마 내일 아침에는 노인을 뵙지 못할 것이다.

송윤은 송하령의 큰오빠. 차후 귀곡의 일맥으로 귀곡을 이어나갈 사람이다. 귀곡은 일맥으로 내려오는 귀곡문(鬼谷門)을 말한다. 귀곡자(鬼谷子)께서 창시한 문파라고는 하지만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귀곡자 때부터. 허나 사실 귀곡자가 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계속 그 명호를 사용했는지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곳으로 송윤을 돌려보냄은 이제 노인이 할 일이 모두 끝났다는 뜻. 남은 일을 하기 위해 편안히 우화등선(羽化登仙)하지 못한 노인은 이제 훌훌 털어버리고 세상을 등질 것이다. 노인은 귀곡의 일맥 귀진자(鬼陣子)였다.

(제 94 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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