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와 헬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햇빛 찬란한 나날-조선희 소설집

등록 2006.04.08 16:20수정 2006.04.09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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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문학사
인간은 정신적으로 누구나 샴쌍둥이가 아닌가 싶다. 조선희의 소설집 <햇빛 찬란한 나날>은 11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편을 통해 흐르는 의식은 그닥 희망적이거나 기쁘고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가 보는 세상은 세기말적이고 병들어 있는 우중충한 곳이다. 그래서 다양한 방법의 심리적 테라피(therapy)가 필요하지만 완전한 치유의 방법이 모색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가 심리 테라피의 진단 도구로 택한 기제는 바로 '고백'이다. 자본주의 시대의 정신적 공황, 심리적 압박, 때로 신체적으로 병들어 시들어 가고 있는 군중 속의 고독한 인간들은 어쩌면 모두가 정신적 샴쌍둥이에 다름이 아닐까?


현대인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조와 울, 긍정과 부정, 자신감과 열등감, 소속감과 고립감 등 자신이 싫어하고 증오하는 부분을 떨쳐 버리고 뭔가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면서도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샴쌍둥이처럼 분리도 완전한 하나도 아닌 병리적 삶을 이어간다.

현대인의 심리치료사가 되기를 자처한 조선희씨는 샴쌍둥이를 그린 <메리와 헬렌>에서 혼자 살아남은 메리에게 다음과 같은 고백을 듣는다.

오늘 날씨 참 좋다, 그지? 맞아, 날씨 참 좋아. 소풍 나오기 좋은 날씨지. 친구는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나봐. 응,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대단해. 뭐가 대단하다는 거야? 어떻게 태어날 때부터 혼자로 태어나서 평생 그렇게 살아갈 수 있지? 혼자 걷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아프고. 위대해 보여. 그래, 위대해. - 메리와 헬렌 중

메리와 헬렌은 두 개의 상체와 하나의 하체를 지닌 샴쌍둥이로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아간다. 우울하고, 사색적이고 비판적인 헬렌과 전혀 반대 기질을 지닌 메리를 현대 과학은 수술을 통해 하나를 분리해 살리려 하고 헬렌이 아닌 메리가 살아남기로 한다.

수술에 성공한 메리는 외적으로는 더 이상 샴쌍둥이가 아닌 개인으로 살게 되지만 그의 내면엔 늘 헬렌이 함께 살며 그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정신적으로 메리는 여전히 샴쌍둥이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현대인의 사제 조선희가 본 세상은 신경증을 앓을 만큼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 안에 살아 숨쉬는 현대인들은 이런 저런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환자들이다. 심리치료사인 현대인의 사제 조선희는 치료를 위해 현대인의 고해성사인 '고백'을 잘 들어야 한다. 수많은 이들의 고해성사인 고백을 들은 그는 다양한 테라피를 치료법으로 내 놓는다.

예를 들면 직장 상사로부터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에게는 리테일 세러피나 부두키트 세러피가, 개인의 승복 할 수 없는 현실적 고통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에겐 햇볕 세러피가, 일 중독자에겐 태업 세러피가, 한 번도 가정과 가족을 꿈꾸어 본 일이 없는 자유인에겐 여행과 모험 세러피가 적용되는 식이다.

물론 그의 세러피 요법이 진정한 치유책이 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그토록 한 개체가 되어 입고 싶은 화려한 꽃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영화도 보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싶어 했던, 그래서 수술을 통해 살아남은 샴쌍둥이 메리가 여전히 죽은 헬렌의 영혼과 함께 인 것에서 알 수 있다.


그의 테라피는 치유법이라기 보다 사회의 병증을 더 도드라지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기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에덴의 저편>의 심리 상담과 종교 회귀, <지난 여름의 섬>의 모성회귀 테라피 등 한 걸음 더 진척된 치료의 비법들을 제시하지만 결과는 별로 낙관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현대의 사제 조선희가 마지막으로 내놓는 히든카드는 무엇일까?

어둠이 밝음을 낳는 것처럼, 기쁨은 슬픔을 낳는 것, 그러니 겁내고 피하려 할 필요는 없다. 슬픔과 우울까지가 다 인생을 인생답게 하는 성분들이니까. - 에덴의 건너편 중

그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현실을 피하지도 도망치지도 말고 그대로 안고 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포기나 절망이 아닌지도 모른다. 현대를 살아가야 하는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샴쌍둥이 메리와 헬렌을 닮은 고독한 현대인의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메리는 매일 퇴근 후 15분쯤 걸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붉고 노란 튤립 무늬가 있는 원피스 차림에 구슬백을 팔에 걸치고 보도 위를 천천히 걸어간다. 병원에서 선물로 받은 원피스는 몇 번의 봄철이 지나가는 동안 원색 무늬가 약간 바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광장이 하나 있다. 금요일 오후의 광장에는 벌써 주말을 맞은 사람들이 몰려나와서 북적인다. - 메리와 헬렌 중

수많은 정신적 샴쌍둥이 메리와 헬렌에게는 매일매일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메리가 헬렌 없이 홀로 가로지르는 광장엔 어떤 삶이, 무슨 그림이 펼쳐지고 있는 것일까.

덧붙이는 글 | 햇빛 찬란한 나날/조선희 소설집/ 실천문학사

덧붙이는 글 햇빛 찬란한 나날/조선희 소설집/ 실천문학사

햇빛 찬란한 나날

조선희 지음,
실천문학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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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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