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너무 완행이야 그래도 해는 안 끼치지"

더디 가더라도 나만의 향내가 나는 사람이 되렵니다

등록 2006.04.10 18:37수정 2006.04.11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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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터 집 앞 둘레를 무언가로 둘렀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쥐똥나무를 심어서 울타리를 만들까 아니면 회양목을 심을까, 뭘 심어야 울타리가 아담하고 괜찮을지 늘 속으로 궁리만 했다. 그렇게 뭉기적거리는 동안 세월은 흘러서 우리 집은 울도 담도 없는 집인 채로 지냈다.


며칠 전에 남편이 그랬다.

"여보, 우리 집 둘레에 회양목 심으면 어떨까? 마침 누가 회양목 판다 그러던데 우리 그거 사서 심을까?"
"응 여보, 회양목은 더디 자라서 어느 정도까지 키우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대. 그거 사서 심자."

토요일 저녁쯤 남편은 얼굴 가득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집에 들어섰다.

"이거 한 번 봐. 회양목이 이 정도일 줄 몰랐는데, 굉장하지?"

남편이 사온 회양목은 어림잡아도 십수 년 이상은 키웠을 거 같았다. 더구나 손댈 필요도 없이 바로 심을 수 있을 만큼 잘 다듬어져 있었다. 남편은 어두워져 오는 저녁 하늘 밑에서 회양목 두 그루를 집으로 들어오는 들머리에 양쪽으로 나눠 심었다. 회양목을 그냥 놔두고 잠자기엔 너무 기분이 좋아서 한 그루라도 심고 싶었단다.


힘을 합쳐 부자(父子)가 회양목을 심고 있습니다.
힘을 합쳐 부자(父子)가 회양목을 심고 있습니다.이승숙
일요일 아침부터 우리 부부는 일복으로 갈아입고 나무 심기에 들어갔다. 먼저 줄을 당겨서 회양목 심을 자리를 한 줄로 나란히 만들었다. 그 다음에 1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두어 시간 만에 30그루의 회양목을 다 심었다. 그리고 나무에 물을 주고 있는데 동네 아저씨가 지나가다가 우리 마당으로 들어섰다.


"뭐 하시꺄?"

아저씨는 강화도 토박이 말씨로 인사를 건네시며 우리 집 마당을 둘러보셨다. "아저씨, 시원한 맥주 한 잔 하세요"라고 권하니 아저씨는 못 이기는 척 하면서 들어섰다.

우리 집 바로 앞은 너른 들판이라서 일철이면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인다. 그럴 때마다 맥주나 시원한 음료수 한 잔 하시라고 청하면 다들 못 이기는 체 하면서 우리 집으로 들어선다. 우리는 타지에서 이사 와서 그렇게 동네 사람들을 사귀었다.

맥주보다는 소주가 좋다 하시면서도 아저씨는 맥주 한 캔을 들이켰다. 그러면서 동네 돌아가는 사정이나 사람들 소식을 전해 주었다. 우리 동네 반장님이 돌아가셔서 새로 반장님을 뽑았는데 우리 옆집 송씨 아저씨가 반장으로 뽑혔단다. 그런데 송씨 아저씨는 생전 가봐야 말이 없고 조용한 사람이라 반 일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단다.

"그 사람 내하고는 동갑 친군데 너무 완행이야. 좀 몰아치기도 하고 그러면서 일을 해야 하는데 그 사람 너무 완행이라서 탈이지. 그래도 남한테 해는 안 끼치는 사람이지."

그러고 있는데 저 쪽에 완행인 송씨 아저씨가 보이는 거였다. 그래서 일요일 늦은 아침에 우리 집 마당에서는 완행과 급행 두 아저씨가 나란히 앉아서 맥주를 마셨다.

완행(가운데)과 급행(빨간 모자) 두 아저씨가 나란히 앉았습니다.
완행(가운데)과 급행(빨간 모자) 두 아저씨가 나란히 앉았습니다.이승숙
다시 회양목을 바라보았다. 내 눈높이보다 훨씬 낮은 회양목 나무에선 좋은 꽃향기가 났다. 온통 푸르기만 한데 어디 꽃이 피었단 말인가? 키를 낮춰 나무를 가만히 살펴보니 나뭇잎보다 연한 연둣빛 꽃이 조롱조롱 피어 있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벌 한 마리가 바쁘게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 다니고 있었다.

회양목 꽃은 태가 안 났다. 푸른 잎 끝에 연한 연둣빛 꽃이 피니 모르는 사람은 새순인 양 여길 만했다. 그러나 은은하게 향기를 풍겼다. 스쳐지나가듯 향기가 조용히 풍겨왔다.

화단 울타리로 많이 심어져 있는 회양목에 꽃이 핀다는 걸 우리가 모르고 지나가는 것처럼 조용하고 변함없는 사람도 우리 눈에 잘 안 뜨인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시끄럽게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람만의 내면의 향기를 맡을 줄 아는 사람에겐 회양목 꽃처럼 피어난다. 그의 존재는 의식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다.

있는 듯 없는 듯이 피어있는 회양목 꽃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조용히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회양목처럼 더디 가더라도 나만의 향내가 나는 사람이 되어야겠단 생각을 했다.

있는 듯 없는 듯이 피어있는 향기로운 회양목 꽃입니다.
있는 듯 없는 듯이 피어있는 향기로운 회양목 꽃입니다.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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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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