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지만...

고창·부안 여행-선운사

등록 2006.04.13 13:37수정 2006.04.13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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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꽃들은 제철을 모르고 꽃망울을 터트리며 먼저 봄을 알리려고 아우성을 쳐 댄다. 이렇게 제철을 모르고 피는 꽃을 광화(狂花)라 한다. 남도의 동백이라면 만개한 후 지고도 남았겠지만 선운사의 동백은 4월 말, 빨라야 4월 중순이 되어야 핀다. 동백이라기보다는 춘백(春伯)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 그래도 세상이 어지러우니 혹시 '광동백(狂冬柏)'이라도 있나 싶어 미친 척하고 떠났다.

선운사 동백꽃, 나무마다 몇 송이만 달고 있다
선운사 동백꽃, 나무마다 몇 송이만 달고 있다김정봉
선운사 동백이 피었는지 알려면 쉽게 알 수 있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동백이 피지 않았다 해도 내 마음은 이미 선운사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금방 비라도 쏟아질 듯한 날씨가 내 마음을 재촉하였는지 모른다.


비오는 날 동백을 보러 떠난다는 생각은 너무나 마음을 설레가 한다. 두툼한 동백 잎은 맑은 날 윤기가 더 나겠지만 빗방울을 뚝뚝 털어 내며 후드득 제 꽃잎 떨어지는 슬픔을 이겨내는 자태는 숭고하기까지 하다. 이래서 비오는 날 동백은 더욱 감상에 젖게 만드나 보다.

비오는 날 동백꽃은 더욱 감상에 젖게 한다
비오는 날 동백꽃은 더욱 감상에 젖게 한다김정봉
선운사 동백은 수령이 500년 가량된다고 하는데 선운사의 역사와 어떤 끈을 맺고 있는 걸까?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577년)에 검단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도 하고, 검단스님이 절친한 친구인 신라의 의운국사와 함께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창건했다고도 한다.

도솔암 가는 길에 진흥왕과 연결되어 생겨난 진흥굴이 있어 후자의 창건 설이 설득력이 있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검단스님과 관련한 구체적 얘기를 들어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절을 세울 당시 선운사 계곡에는 도적들이 들끓었는데 검단선사가 이들을 교화하고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 생계를 잇게 했다. 그들이 사는 마을을 검단리라 부르고 그들은 해마다 봄 가을이 되면 선운사에 소금을 보냈다 하는데, 실지로 해방 전까지만 해도 이 일대 염전 사람들은 선운사에 소금을 보냈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의 역사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는 동안 백제와의 끈은 가능한 한 맺지 않으려고 한 점을 감안하면 검단스님에 의해 백제 때 세워진 절이라는 창건설이 신뢰성이 있다.

선운사는 그 후 고려 때 중수됐으나 폐사되었고 조선 성종14년(1483)에 이르러 지금 대웅전 앞에 세워진 구층석탑(지금은 6층석탑)을 보고 대대적으로 중창했다. 현재 관음전에 모셔져 있는 금동보살좌상(보물 제 279호)과 도솔암 내원궁에 모셔져 있는 지장보살좌상(보물 280호)은 이 당시에 만들어 졌다. 이때 동백나무 숲도 인공으로 조성되었다는 말이 있다. 동백의 나이가 500여살 이라고 한 것도 이를 근거로 한 것 같다.


동백나무 숲(천연기념물 184호로 지정),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동백나무 숲(천연기념물 184호로 지정),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김정봉
선운사는 정유재란(1597년)을 맞아 또 한 번 시련을 겪게 된다. 다시 광해군5년 (1613년)에 3년에 걸쳐 재건을 하고 그 후 몇 차례의 중수 끝에 오늘에 이르게 된다. 대웅전, 만세루, 영산전, 명부전 등 주요건물이 이때 지어진 것이다.

대웅전과 육층석탑
대웅전과 육층석탑김정봉
대웅전과 만세루의 나이는 약 400년 정도 되고 동백이 약 500년 정도 되었으니 동백의 나이가 대웅전, 만세루 보다 많다.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벌써 동백나무의 나이는 대략 100살 정도이니 선운사를 폐허로 만든 정유재란 때도 나이가 꽤 되었다. 동백나무는 정유재란 때 심한 상처를 입었겠지만 그래도 구층석탑과 금동보살좌상과 함께 꿋꿋하게 그 생명을 유지하였다.

선운사 주요 건물들은 모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맞배지붕 건물은 아기자기하고 화려하기보다는 힘있고 시원한 멋이 있다. 이와 더불어 대웅전과 만세루, 천왕문이 질서를 유지하며 정연하게 서 있어 차분한 느낌을 준다.


대웅전과 만세루 측면, 맞배지붕의 시원함과 아기자기하기보다는 질서 정연한 공간배치가 선운사의 멋이다
대웅전과 만세루 측면, 맞배지붕의 시원함과 아기자기하기보다는 질서 정연한 공간배치가 선운사의 멋이다김정봉
선운사의 멋을 지붕과 가람배치의 시원한 맛에서 찾는다면 건물 앞의 넓은 공간과 정면9칸이나 되는 건물의 길이에 비해 높이가 높지 않은 만세루는 천왕문에서 바라보는 것이 제일이고 대웅전은 만세루 강당에서 보는 것보다 동백숲 언덕에서 비스듬히 보는 것이 훨씬 좋다.

만세루 정면, 정면 9칸이나 되는 큰 건물이면서 높이는 높지 않아 시원한 멋이 있다
만세루 정면, 정면 9칸이나 되는 큰 건물이면서 높이는 높지 않아 시원한 멋이 있다김정봉
동백나무 숲 언덕에서 보면 대웅전과 만세루, 천왕문의 지붕과 앞산 봉우리가 서로 닮아 있다. 앞산 봉우리의 '둥근' 삼각형이 세 지붕에 내려앉은 모습이다.

대웅전, 만세루, 천왕문의 지붕과 앞산의 봉우리가 닮았다
대웅전, 만세루, 천왕문의 지붕과 앞산의 봉우리가 닮았다김정봉
다행인지 불행인지 동백나무엔 몇 송이 꽃 밖에 달고 있지 않았다. 부석사를 찾았다가 사과꽃에 홀려 사과꽃만 보고 온 우를 범하지 않아도 될 성 싶다. 한 배에서 난 형제들도 제각각이라 남들은 꽃망울도 맺지 못했는데 벌써 꽃망울을 터트리는 놈이 있었다.

혈기 왕성한 근육질의 청년을 보는 것 같다
혈기 왕성한 근육질의 청년을 보는 것 같다김정봉
지나가는 사람마다 "늙어서 그런지 잎에 윤기가 없네. 꽃 몽우리도 조그맣고"라고 한 마디씩 하지만 굵은 줄기를 보면 다르다. 혈기 왕성한 근육질의 청년을 보는 듯하다. 우람한 줄기에 소박한 붉은 꽃망울을 맺고 있는 것이 덩치 큰 순박한 어른을 보는 것 같다. 꽃으로만 보면 여느 관광지에 조경으로 심어 놓은 동백만 하겠나마는 대웅전과 함께 하는 동백은 500년의 온갖 시련을 다 겪었기에 그 깊이가 다르다.

대웅전과 함께 하는 선운사 동백은 그 깊이가 다르다
대웅전과 함께 하는 선운사 동백은 그 깊이가 다르다김정봉
꽃이 지는 모습은 제각각 다르지만 동백이 지는 모습은 잔인하기까지 하다. 그 모습을 두고 마치 비정한 칼끝에 목이 베어져 나가는 것 같다고 하기도 하고 눈물처럼 후드득 진다고도 표현한다. 시들지 않고 떨어지는 꽃, 시들어 추한 모습을 보이기 전에 떨어져 버리는 꽃, 슬퍼 보이지만 스스로는 슬퍼하지 않은 자존심이 강한 꽃이다.

'여자에게 버림받고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는 김용택의 시구보다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떠나실거에요'라는 송창식의 노래에 앞서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로 시작하는 오월의 노래가 생각나는 것은 어떤 연유인가?

천왕문 아래에 주구리고 앉아 손을 턱에 괸 채 만세루 넘어 아직 일러 피지 않은 동백나무를 보는데 왜 한 친구가 생각나는 것일까? 고등학교 때 광주사태-그때는 광주민주화 운동을 이렇게 불렀다-를 겪은 그 친구는 광주사태 얘기만 나오면 소주잔을 앞에 두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두운 시대를 겪고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70-80세대들의 불행이다.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산수유만 피어 있습니다'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산수유만 피어 있습니다'김정봉
눈물 때문인지 빗물 때문인지 앞이 흐려오는데 관음전 담벼락에 기대어 노랗게 핀 산수유가 흐릿하게 다가왔다. 고의로 그 친구 생각을 지우려고 시선은 아직 일러 피지 않은 동백을 대신해 산수유를 향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4월1일에 다녀온 기사입니다. 지금쯤 선운사 동백꽃이 피기 시작할 것 같습니다.

덧붙이는 글 4월1일에 다녀온 기사입니다. 지금쯤 선운사 동백꽃이 피기 시작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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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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