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가 한잔술 나누는 소풍 보셨어요?

추억으로 돌아가는 방송고 봄소풍 풍경

등록 2006.04.17 10:39수정 2006.04.1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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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예전엔 소풍 간다고 엄마한테 백 원 받아 갔잖아. 그 생각 나서 엄마한테 전화해서 나 소풍 간다고 만 원 달라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데."


방송고등학교 소풍 가는 날 버스 안에서 한 아주머니가 하시던 말씀입니다. 돌아보면 아스라이 먼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빛바랜 흑백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던 소풍입니다. 진학대신 꿈을 접고 남보다 먼저 거친 사회로 뛰어들어 살아온 날들, 한 가정을 이루어 아이들 소풍 보내기 위해 김밥 준비하며 보내온 날들이 그간의 삶이었습니다.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것 같던 소풍을 방송고에 입학해서 맞은 것입니다. 백 원 받아 소풍 가던 추억이 생각나 다시 어린애가 되어 친정 엄마에게 전화해 소풍가니 만 원 달라고 어리광처럼 말했다는 아주머니 말씀이 가시처럼 가슴에 박힙니다. 가슴에 담은 말 다 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런 사연 하나 없이 방송고에 입학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16일 봄이라 꽃은 피고 햇살도 푸짐한데 바람이 심해 꽤 쌀쌀한 날씨였습니다. 여주 신륵사 맞은편에 학급별로 둘러앉아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었습니다. 한 달에 두 번 출석 수업을 하지만 이렇게 마주앉아 얘기 나누기 쉽지 않습니다.

얇은 옷을 입고 와서 덜덜 떠는 어린 여학생에게 차에 실려 있던 담요 가져다주고 스카프 목에 두르라고 건네주는 왕언니는 오래 전부터 다정히 지내온 친언니처럼 살가운 정이 느껴집니다.

롯데월드나 에버랜드로 소풍가서 각자 흩어져 놀다가 정해진 시간이 되면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요즘 아이들의 소풍과는 다릅니다. 선생님도 한 잔 우리도 한 잔 권하고 받으며 술 마셔도 나무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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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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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한잔술에 취기가 돌면, 기타 치며 함께 노래도 부릅니다. 성능이 안 좋아 잡음이 나는 메가폰 들고 선생님 모셔다 노래도 듣고 두둥실 얼쑤 춤도 춥니다. 족구 한판 해야 한다며 선생님도 한 팀, 학생도 한 팀 마주보며 족구도 합니다. 지는 팀이 십만 원 내기라며 응원에 열을 올리지만 경기 끝나면 승패에 관계없이 손 마주 잡고 어깨 두드리면 그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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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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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행운권 당첨되면 아이처럼 좋아 뛰어나갑니다. 받아온 상품이 무언가 궁금해서 돌아와 앉자마자 뜯어봅니다. 번호를 부를 때마다 함성과 탄식이 번갈아나옵니다. 이제나 저제나 내 번호가 불릴까 기대하며 앉아 있는 모습은 천진한 아이의 모습과 꼭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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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불편한 몸 마다 않고 따라온 소풍, 남들처럼 성큼성큼 다니진 못해도 웃으며 노래하는 동료들을 보면 즐겁기만 합니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다며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담임선생님과 약속하던 입학식이 어느새 한 달이나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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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4월의 푸른 하늘 아래로 부는 바람 따라 꽃잎도 꽃향기도 흩날립니다. 가슴 한 구석에 남다른 사연을 안고 살아온 방송고 학생들의 삶의 향기도 꽃잎이 되고 꽃향기가 되어 함께 날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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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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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 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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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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