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사진 속 젊은 내 친구야
그 해 4월, 떠나가버린 네가 그립다

4·19 혁명 때 친구 떠나 보낸 내 아버지의 편지

등록 2006.04.18 17:09수정 2006.04.18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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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가끔 부모님의 일기장을 들추어 본 일이 있으신지요? 나영준 기자의 아버지는 해마다 이맘때면 4·19 묘지를 찾습니다. 그 곳에 잠들어 계신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이 기사는 나영준 기자의 아버지께서 평소 정리해 놓으신 글을,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1960년 4월 19일 당시 아버지 나명열씨는 대학 3학년(동국대 정외과)이었고 경무대 앞에서 날아온 총탄에 삶을 접어야 했던 친구 분(노희두)은 같은 학교 법학과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은 충남의 서천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함께 다닌 고향 친구였다고 합니다. <편집자주>
a 친구 노희두(뒷줄 오른쪽 두 번째)와 바로 옆에 선 아버지.

친구 노희두(뒷줄 오른쪽 두 번째)와 바로 옆에 선 아버지. ⓒ 나명열

a 중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

중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 ⓒ 나명열

희두야, 올해도 다시 네 이름을 불러보는구나. 지난 한해 동안 잘 있었니?

무심한 세월은 기어코 흘러 다시 4월이 돌아왔구나. 굳이 '잔인한 4월'이란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이맘 때쯤이면 자주 잠을 설치게 되는구나.

긴 밤 알지 못할 꿈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자리끼 한 잔을 들이키곤 슬며시 담배 한 가치를 빼물게 되는구나.

한숨인지 연기인지 모를 뿌연 탄식을 한 자락 내뱉고 나면 어느새 기억은 자꾸만 아득한 곳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그러고 보니 스무 살 시절, 콜록거리며 너에게 담배를 배우던 기억마저 푸르게 생생하구나.

그래, 사람이 늙어간다는 것은 한편 내 안의 완고한 추억을 다져가는 과정임을 안다.

때로 거울을 들여다보며 이제는 어떤 이유로도 젊음이란 단어와 연결될 수 없는 초라한 자신을 깨닫게 되지만 어느새 펼쳐놓은 추억의 사진 속 너를 만나니 그 사이 마음은 거리를 내달리던 그 시절로 달려가게 되는구나. 친구야, 기억하니. 그 때 그 4월의 거리를.

친구야, 초·중교를 함께 다녔던 너를 대학에서 다시 만났을 때의 기쁨은 굳이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지. 고향인 서천 앞바다를 하루종일 벌거벗고 함께 뛰고 구르던 너였기에 우리는 비록 과는 다르지만 대학 시절 늘 함께 붙어 다녔지.


늘 활달하고 시원한 성격의 네가 있어, 우리 젊은 날은 짧았지만 아름다웠던 것 같다. 캠퍼스에 흐르는 낭만을 즐기던 그 시절. 때로는 새침떼기 여학생을 골려주기도 하고 밤이면 한강에 물 대신 술을 채워 모두 마셔 버리자는 호기를 부리기도 했었지.

"함께 가자"던 너의 마지막 담배, 지금도 그 연기 손에 잡힐 듯 한데


하지만 그 시절이 모두 낭만에 젖을 수만은 없었다. 3·15 부정선거 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산 앞바다에서 고 김주열군의 시신이 떠오르자 우리의 젊은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동료 선·후배들과 뜻을 모으며 민주화의 열망에 불타오르기 시작했지.

19일 아침 8시 무렵이었던 것 같다. 이화동 집에서 등교하던 길에 종로 5가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구내에서 시위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지. 마음이 급해지더라. 급히 학교로 향해 정치학회 사무실에서 동료·선배들과 플래카드를 준비하고 앞뜰에서 속속 시위의 대오를 갖추었지.

a 국립4.19묘지 홈페이지에서 찾은 노희두씨의 사진입니다.

국립4.19묘지 홈페이지에서 찾은 노희두씨의 사진입니다. ⓒ 국립4.19묘지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왠지 주위를 돌아보며 네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게 됐지. 이어 정문 앞에 이르자 경찰이 교문을 잠그고 시위를 제지하고 있었지. 죽을 힘을 다해 저지선을 뿌리치고 정문을 돌파하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네가 달려왔었지. 그리고 경무대로 향하기 전 너는 말했었지.

"명열아, 미안해. 학교에 들어올 수가 없어서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우리 함께 가자."

네 말대로 우리는 함께 갔다. 경무대를 향하던 중 중앙청 정면, 당시 조달청 앞에 이르러 경찰의 제지를 받고 연좌하여 우리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 그 때 네가 나에게 건네던 담배 '백양', 그게 이생의 마지막 담배가 될 줄이야, 하늘에 올려보내던 그 연기의 흐름이 지금도 손에 잡힐 듯하구나.

12시를 넘겨 동성고등학교 등 고등학생들이 합세하여 중앙청 저지선을 넘자 경찰의 최루탄이 발사되기 시작했지. 하지만 노도와 같이 밀어대는 젊은 함성은 소방차를 앞세우고 운행정지 중인 전차를 밀며 경무대 앞 파출소 넘어 무대 담까지 이르렀지.

그래, 기억나니? 그 짧은 순간, 너는 나를 돌아보며 '할 수 있다'는 듯이 밝게 웃었지. 하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며 순간 너와의 사이가 멀어졌지. 무어라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분노의 함성에 묻혀 멀어져가는 너를 안타깝게 쳐다보던 그 순간이었어. 그래… 그랬어. 그런데… 그리고.

a 1960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인양된 김주열의 시체로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등 처참함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사건으로 마산 등 전국 각지에서 반 이승만 시위가 더욱 격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1960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인양된 김주열의 시체로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등 처참함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사건으로 마산 등 전국 각지에서 반 이승만 시위가 더욱 격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 4·19기념도서관

무수한 발길질, 네 생각마저 깜빡 잊을 정도였다

곧바로 천지를 울리는 총성이 귓가를 스치기 시작했지. 잠시 멍했고 몸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주위에 있던 이들이 날아온 총탄에 맞아 넘어지고 있었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지.

그 때 누군가 내 손을 낚아챘지. 응조형 기억나지? 그래, 그 형이 내 손을 잡고 전차 뒤로 이끌더라. 그리고 진명여고 강당 샛길로 우선 몸을 피했지. 정신을 차렸을 때 만난 국형이가 너와 비슷한 사람이 총상을 입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우선 서울 시립병원으로 달려갔다 허탕을 쳤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가 이화여대 부속병원에 가서 부상당한 이들을 확인했지만 너는 그 곳에도 없었지. 그 때 앰뷸런스를 타고 인턴 의사 한 분이 부상자를 실으러 나간다기에 대성 선배와 무열이와 함께 무작정 몸을 실었지.

하지만 을지로 5가 중앙시장 앞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아 하차했어야 했지. 이어 전찻길에 무릎을 꿇린 채 날아오던 무수한 경찰봉과 발길질. 어찌나 정신이 없던지 그만 네 생각마저도 깜빡 잊을 정도였다.

"빨갱이 새끼들, 죽여버려! 이런 개새끼들은 이 자리에서 즉결 처분해도 돼. 뭘 봐, 이 새끼야. 대가리 숙이란 말이야! 이 ×새끼야."

뒷머리를 얼마나 많이 맞았던지 아프단 느낌도 없더구나. 더 놀라운 건 실제 총살하겠다는 소리였지. 차마 남들 앞에선 총질을 못하겠는지 앰뷸런스에 태워 중부 경찰서로 연행하더라. 그리고 다시 차 안에서 이어진 구타. "살려달라"는 이야기도 차마 나오지 않는, 턱으로 날아들던 무참한 발길질. "이게 무슨 짓이냐?"고 용기있게 말리던 그 인턴 선생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아마 차 안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 같구나.

경찰서에서는 반 시체나 다름없는 우리가 성가셨던지 다행히 돌려보내주었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 구타당한 곳을 치료하고 밤늦은 시간까지 대기를 했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는데도 오히려 의식은 또렷해지더구나.

그런데도 아직 너의 소식은 들을 수가 없었지. 그 때 병원 내에 시위에 가담한 학생들이 있으면 다시 체포하겠다는 소식이 들려왔지. 우선 몸을 숨기란 이야기에 고집을 꺾고 빠져나와 집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이어지던 혼돈의 시간, 꿈을 꾸는 것 같았는데 다음 날 어디선가 네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지. '그래… 이건 꿈일 거야'라고 생각하고 다시 쓰러졌지. 그리고 다시 며칠을 앓아누웠지. 하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모든 것은 현실 그 자체였지. 얼마를 울었을까. 울다 지쳐 쓰러져 다시 기운을 차리고 통곡에 빠졌던 그 날들….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비척거리며 선 네 무덤가. 떨리는 손으로 꽃 대신 꽂아놓은 백양 담배 한 개비. 목놓아 엎드려 울고 또 울부짖고…. 다시는 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혼절에 빠지고. 그리고 또, 또….

네 앞에서 나는 죄인... 우리 곧 만나겠구나

a 60년 4월 10일, 친구(오른쪽 두 번째)와 마지막으로 남긴 사진.

60년 4월 10일, 친구(오른쪽 두 번째)와 마지막으로 남긴 사진. ⓒ 나명열

친구야,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니? 돌이켜보면 그 날이 있기 열흘 전쯤 인수봉에 산행을 갔을 때 평소 너답지 않게 어두운 표정이었던 것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죽마고우란 녀석이 그런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그저 고개만 숙이게 되는구나.

희두야, '너 대신 내가 죽었어야 했다'는 식의 책임지지 못할 이야기는 차마 하지 못하겠구나. 그 뒤 한평생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끼기보단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자기 합리화를 앞세운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니.

그 뒤,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졌고 그 녀석들이 예전의 너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나도 머리숱이 적어지는 중년을 지나 어느덧 할아버지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희끗한 나이가 되었구나. 그리고 어느 덧 죽음이라는 단어가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질 만큼의 세월을 걸어왔구나.

a 4·19 이후 아버지의 모습.

4·19 이후 아버지의 모습. ⓒ 나명열

친구야. 그 뒤로도 이 땅의 정의와 자유를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피와 땀을 흘렸단다. 그것으로 먼저 간 너에 대한 위로를 삼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 젊은 날의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진정성만은 믿고 싶구나.

어찌됐건 친구야, 너와 함께 한 시간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고 진하게 가슴을 울려오는구나. 이 짧은 생, 한 판 놀이굿을 끝까지 너와 함께 하지 못한 것은 정말로 가슴 아프지만 이제 나도 너의 곁으로 갈 날이 그리 멀지만은 않은 것 같아 한편 다행인 듯도 싶구나.

친구야, 19일엔 다시 너를 만나러 간단다. 가난한 노인이 준비할 것이 무에 그리 많겠니. 값지고 귀한 먹거리가 아니어도 기쁘게 반겨주겠지?

우리 다시 예전을 생각하며 소주 한 잔, 담배 한 개비 맛있게 나누자꾸나. 그리고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시간이 끝나면 우리 다시 예전처럼 부둥켜안고 웃음을 흩뿌리자. 문득 추억이 귓가에서 돌돌 소리를 내며 흐르는 듯하구나.

보고 싶다, 친구야. 사랑한다, 내 친구 희두야.

2006년 4월 18일 친구 명열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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