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 한번 볼텨? 진짜 농사꾼 같제"

드디어 내 손도 '아버지의 손'이 되고 있습니다

등록 2006.04.19 11:15수정 2006.04.20 01:12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나는 요즘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놈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별 볼일 없는 손 자랑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내 손 한번 볼텨? 죄다 갈라졌다니께."

다들 시큰둥하니 반응이 별로입니다. 아는 처지에 한심하다는 표정은 내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도 생각해준답시고 한 마디 던져 줍니다.

"그러네…."
"그렇지, 잉. 예전에는 이뻤는디, 인저 진짜 농사꾼 같지?"

내가 그렇게 말하면 새삼스럽게 내 얼굴을 쓱 훑어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산도적놈 같기만 한 몰골을 상기시켜 주겠다는 듯이 '예쁘긴, 당신 생김새를 한 번 보고 얘기하라구'라는 표정까지 곁들여서 말입니다.

몰골은 산도적이지만 내 손은 정말 고왔습니다


그래도 내 손은 정말로 고왔습니다. 보는 사람들마다 그랬습니다. "아, 손이 참 곱네요"라고요. 중학교 다닐 때 누님의 강요에 못 이겨 몇 차례 손에 로션을 발라봤지만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결혼식 때도 역시 마찬가지) 화장품을 손에 댄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이 갈라져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말 그대로 어지간히도 '게으른 손', 좋게 말하자면 '고운 손'이었습니다.

지난해 겨울 <오마이뉴스>에서 책 낸 시민기자들 소개하겠다고 취재 나온 심은식 기자가 그랬습니다.


"손을 좀 찍을까 하는데요, 농사 지으면서 기사 쓰는 송 기자님 손 좀 보여 주세요."
"아, 손요. 워낙 계집애 같아서…."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손을 선뜻 내밀지 못했습니다. 사진은 찍었지만 심 기자의 표정은 별로였습니다. 결국 다른 시민기자들의 손과는 달리 클로즈업된 내 손은 기사에 실리지 못했습니다.

아마 심 기자 역시 너무나 '예쁜 송 기자의 손'을 농사짓는 손이라고 기사에 올리기에는 좀 민망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그때는 농사를 시작할 단계였으니 '예쁜 손' 그대로 온전했었지요.

세상 농사 다 짓는 것 같은 엄살, 그래도 영광의 상처인걸요

요즘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 않는 날이면 저녁 9시도 채 안 돼서 곯아떨어집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명상을 하거나 말거나 방바닥에 누우면, 주술같은 외마디 '아, 좋다'에 온몸이 노근노근해져오고 잠이 기분좋게 쏟아져 옵니다. 눈뜨면 곧장 기분좋은 새벽입니다.

사람들이 찾아오면 세상 농사 혼자서 다 짓는 놈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습니다.

"재밌다니께, 농사짓는 게 너무 재밌어, 새벽에 밭에 나가믄 아침 점심 먹는 시간 빼놓고는 저녁에 들어온다니께, 우리 집사람한티 한번 물어보라구 정말이라구."

거기다가 누가 물어보기라도 한 듯 예의 그 손 자랑을 능청스럽게 덧붙입니다.

"한번 갈라지기 시작허니께 잘 안 낫네, 아리고, 아프고 그러네."

어린애처럼 어쩌다 생채기난 것을 가지고 아프니 어쩌니 '호∼' 한 번만 해달라고 별의별 엄살을 다 떠는 덜 떨어진 인간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영광의 상처처럼 기분이 좋은 걸 어떻게 합니다.

얼마 전 첫 수확물을 싸들고 대전에 나가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손 자랑을 늘어놓았는데, 여동생이 물기어린 목소리로 받아줬습니다.

"셋째 오빠 손 보니까, 아버지 손 생각나네. 솥뚜껑 같은 손으로 농사 잘 지으셨는데, 오빠가 이제 그 아버지 손처럼 돼가네."

어쩌면 나는 이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무던히도 한심스러울 만치 떠벌리고 다녔는지도 모릅니다.

내 손, 그리고 아버지의 손

2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손, 우리 아버지는 평생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새벽에 밭으로 나가 다 저녁에 돌아오셨습니다. 도시화 바람에 고향의 논밭이 날아가 버리자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솥뚜껑 같았던 아버지의 손, 7남매를 먹여 살렸던 아버지의 손은 농기구 대신 소주잔을 들었고 끝내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솥뚜껑처럼 큰, 아버지의 손을 기억할 뿐 제대로 만져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날 저녁 아버지를 떠올리면 자식들에게 내 손을 만져 보라고 했습니다.

"어? 아빠 손이 정말로 갈라졌네?"

큰아이 인효는 뭘 좀 아는지 안쓰럽게 쳐다보는데, 작은아이 인상이 녀석은 물끄러미 보다가 한마디 툭 던집니다.

"꺼끌꺼끌하니께, 등허리 긁어주면 딱 좋겠다."

그랬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그러셨습니다. 우리들의 등을 긁어 주시곤 했습니다. 어린 등짝을 뒤덮을 만큼 큰 손, 그 꺼칠꺼칠했던 아버지의 손은 언제나 시원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내 손은 바로 아버지의 손이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자식들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고 넉넉하게 껴안을 수 있는 큰 손, 나는 어쩌면 그 '아버지의 손'이 되기 위해 농사를 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2. 2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3. 3 "대통령, 정상일까 싶다... 이런데 교회에 무슨 중립 있나" "대통령, 정상일까 싶다... 이런데 교회에 무슨 중립 있나"
  4. 4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5. 5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