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전투에 쓰여졌던 대포입니다. 포는 인명 살상용이기보다는 적함을 깨뜨리는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합니다.이승숙
전쟁은 적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함에서부터 시작된다. 과거전이나 현대전이나 예외 없이 포 사격으로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적에게 공포감을 주고 아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제국주의의 야욕을 감추고 서구 열강이 아시아를 침탈할 때 그들은 함대를 이끌고 포함외교(砲艦外交)를 했다. 그들은 먼저 통상을 위한 조약을 요구해 온다. 그러나 상대국이 이에 응하지 않으면 그들은 함포를 날리며 위협을 가하고 그 뒤에 다시 조약을 요구한다.
1871년 미국은 아시아함대 사령관에게 조선원정을 명령했다. 배 5척을 이끌고 나타난 그들은 바닷길 측량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조선은 몇 년 전의 병인양요를 승리로 이끈 자존심이 강한 나라였다. 미군은 함포를 쏘며 초지진으로 밀고 들어왔다. 약 2시간의 함포공격으로 초지진은 무너졌는데 지금도 그 때의 포탄자국이 초지진 소나무 둥치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강화의 갯벌은 그들에게 이기기 힘든 적이었다. 무기를 끌고 발이 푹푹 빠지는 초지진 앞 갯벌을 빠져나오느라 힘을 소진한 미군은 힘을 비축하기 위해 그 곳에서 하룻밤 야영을 했다. 전쟁에서 시간은 금보다 더 귀한 것인데 미군은 귀한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그래서 조선군은 시간을 벌어서 진을 정비할 수 있었다.
미군의 진격을 막은 것은 조선의 군대라기보다는 강화의 자연적 조건이었다. 갯벌과 해무(海霧)가 그들의 진격을 지연시켜준 것이다.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과 짙은 바다 안개 속에서 미군은 힘을 소진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진격을 하룻밤 늦췄다.
그 다음 날 저녁 때 쯤 광성보로 미군이 밀려들어왔다. 나라에선 이미 병인양요 때 호랑이를 잡던 강계포수들을 불러 모아 재미를 본 적이 있었으므로 신미양요 때도 이들을 앞에 내세웠다. 그러나 조선군대의 무기는 너무 보잘것이 없었고 그래서 군사들은 거의 맨 몸으로 적과 싸워야만 했다.
미군의 공식 집계를 보면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350명, 포로 20명으로 나타난다. 포로로 잡히느니 죽음을 택하는 게 났다고 여긴 조선의 군사들은 바다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도 많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