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론'스펙트럼에서 기독교를 보면

제프리 버튼 러셀의 '악의 역사 제 2권' <사탄>을 읽고서

등록 2006.04.20 15:03수정 2006.04.20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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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기독교에는 물질적인 것은 저급한 것으로, 신령한 것은 고귀한 것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을 마치 진흙에 묻힌 진주처럼, 천한 육신에 갇힌 영혼의 소유자로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물질과 영을 나누는 이원론적 사고가 그것이다. 그 때문에 물질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악의 영역이고, 신령한 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물질이든 신령한 것이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 속에 있다고 여기는 부류도 많다. 물질과 영을 따로 나누거나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보는 것이다. 당연히 물질 세계를 지배하는 악의 영역도 하나님의 통치 속에 들어 있을 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두 흐름이 기독교계에 크게 대두되기 시작한 때는 2세기였다. 그 뒤 3세기와 4세기, 그리고 5세기를 거치면서 더욱 분화되고 확대되었다. 이른바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분, 신령한 세계와 악령의 대립, 그리고 그 대립과 분열 속에서 발생했던 '정통'과 '이단' 사이의 치열한 다툼이 그것이다.

이는 제프리 버튼 러셀이 쓴 '악의 역사 제 2권'인 <사탄>(김영범 옮김·르네상스·2006)을 보면 명백히 알 수 있다. 이는 제 1권인 <데블>의 연장선이기도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초기 기독교 내의 이원론적인 경향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잘 엿볼 수 있다. 그것도 5세기까지를 중점으로 다루고 있다.

다른 종교들도 다르지 않겠지만, 기독교는 엄격한 의미에서 이원론적 종교이다. 기독교의 근간에는 이원론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물질세계와 신령한 세계, 영혼과 육신이 언젠가는 분리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바로 죽음을 기점으로 그렇게 나뉜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까지도 그런 이원론적인 색채를 너무 짙게 드러내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다. 이 세계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을 신령한 세계와 악령의 세계, 성령과 사탄의 대립구도로 단정해버리는 것이다. 때때로 기독교 내에서 극심한 분열이 발생하는 것도 대부분 그 때문에 비롯된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들은 최근에서야 비롯된 일일까? 그렇지 않다. 이런 현상들은 초기 기독교 2세기부터 5세기에 달하기까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현상들이다. 로마의 기독교 박해와 기독교인들의 순교, 그를 둘러싼 기독교 내부의 상반된 평가, 그 속에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던 신학자들과 성인들의 여러 가지 악에 대한 규정들, 그리고 그 속에서 일어났던 정통과 이단의 분열 등이 그렇다.


"어둠의 지배자인 악마가 이단자와 교회를 싸움 붙인다는 생각은 수세기에 걸친 결과물이다. 만일 세계가 빛과 어둠이 우주전을 벌이고 있는 전쟁터라면,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의 지휘 아래 빛의 공동체인 교회가 어둠의 공동체와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면, 기독교는 악의 화신과 전투 중이므로 적에게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나 사도 교부들은 이 교의를 폭력 사용의 정당화에 대한 논리적 근거로 사용하지 않았다."(42쪽)

적어도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교회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세력들에 대해 소극적인 대항을 했다. 그건 다름 아닌 순교로 일관했던 일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세력들을 악의 화신이나 마녀로 취급하여 가혹한 조처를 취하게 된다. 그때부터 관용적이지 못한 교회의 처신은 교회와 사탄이라는 두 세력간의 다툼으로까지 비화되고 확대되었다.


그래서 2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점차 '세상의 지배세력', 즉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기독교를 변호하려는 학자와 학파가 등장했다. 이른바 '변증 교부'들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 당시 유명한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인 '이그나티우스'는 순교를 "지상의 군주인 악마와의 투쟁"으로 보았다. 또한 '바나바'는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라는 두 왕국이 서로 다투고 있고, 대부분 악마의 수중에 들어 있다"고 보았다.

3세기의 교부인 '클레멘스'는 악은 선의 반대이기에 결핍 또는 결여 자체로 보았고, '오리게네스'는 하나님의 자비와 자애는 모두를 포용하기에 악마까지도 구원될 수 있다는 견해를 내 비치기도 했다. 참으로 포용력 있는 관대한 접근방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이단으로 지목됐던 '도나투스'는 박해의 공포에 떠는 자, 이교도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자, 교회를 배반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로 복귀될 수 없다는 강한 신념을 내비쳤다. 그 때문에 이단의 배면에는 분명히 악마가 있으며, 박해에 굴복한 자들은 사탄의 하수인이라고까지 쏘아 부치기도 했다.

그 뒤 4∼5세기를 거치면서 기독교 전통은 그리스와 라틴을 기준으로 동서로 분화된다. 그 당시 대표적인 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오직 선만을 행하시는 분으로, 악은 그 외의 다른 존재에 의해 행해지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위대한 선을 위해 이 악행을 용납하고, 더 위대한 선은 우주에서 행해지는 자유의 모습이라고 보았다.

그런 이원론의 틈 속에서, 기독교 내의 유명한 '변증 교부'들은 이른바 기독교 내의 '정통'이 되고, 그와는 다른 견해를 내 비치거나 좀더 극단으로 나가면 모두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정통에서 밀려난 자들이 이단으로 내 몰렸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그런 이원론적인 사상이 기독교 내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그래서 좀더 온건한 쪽에 서면 주류 정통이 되고, 극단으로 나가면 이단으로 내 몰리게 된다. 하지만 이원론이라는 스펙트럼 안에 넣어 놓고 보면 모두들 그 속에 들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극과 극, 그 어느 사이에선가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기 쪽이 정통이라며 목청을 높이는 꼴을 보면 꼴불견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이원론의 양극단보다는 서로의 간격에서 균형을 이루는 게 중요하다. 물질과 영의 대립, 사탄과 천사의 대립, 악령과 성령의 다툼이라든지, 정통과 이단의 대립이라는 그 칼끝을 세우기보다는, 그것들 나름 대로를 인정하면서도 참된 선을 증진시킬 목적과 그 방향으로 세워 나아가는 게 더없이 소중할 것이다.

악의 역사 세트 - 전4권 - 데블, 사탄, 루시퍼, 메피스토펠레스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 김영범 옮김,
르네상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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