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야산에서 만난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

화야산은 지금 '산야화' 세상입니다

등록 2006.04.21 15:08수정 2006.04.21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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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에서 북한강을 건너다보면 마을을 감싸안고 산능선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 산능선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짚어보세요. 그곳이 바로 화야산입니다.

가평군 외서면과 설악면에 걸쳐져 있는 이 산은 뾰루봉과 고동산을 사이에 두고 세 개의 큰 봉우리가 큰 능선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봄이면 갖가지 들꽃을 피워내는, 알만한 이들에게 '꽃의 천국'으로 알려진 산이기도 합니다.


청평대교를 지나 북한강 건너 마을에 들어서니 온통 하얀 꽃 세상입니다. 길 양편에 벚꽃이 늘어서 하얀 꽃구름 사태를 빚어 놓았습니다.

몇 십리길 일까요? 벚나무 가로수가 끝도 없이 이어졌는데 어느 한 송이 입 다문 꽃잎 하나 없고 어느 한 송이 시든 꽃 하나 없는 절정의 순간입니다.

벚꽃축제가 열리는 유명한 곳 못지 않은 벚꽃길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벚꽃길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때문인지 찾는 이들도 거의 없습니다. 한껏 여유를 부리며 벚꽃 핀 가로수 길을 걸어 봅니다. 오늘따라 하늘이 유난히 파랗습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난 하얀 꽃은 더욱 눈이 부십니다.

a 2006년 4월 산자락 아래 핀 복사꽃.

2006년 4월 산자락 아래 핀 복사꽃. ⓒ 김선호

a 2006년 4월 벚꽃 핀 가로수.

2006년 4월 벚꽃 핀 가로수. ⓒ 김선호


화야산을 오르기 위해 큰골마을에 들어섰을 때도 벚꽃의 행렬은 여전히 따라옵니다. 이 산이 '들꽃의 천국'이라는 입 소문은 등산로 초입부터 그 확실한 근거를 보여 줍니다.

산현호색이 산비탈을 따라 밭을 이루듯 피어나 있습니다. 산 속에 핀 꽃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피어나는 꽃들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색깔의 순서인데 맨 처음 봄꽃들은 대개 노란색입니다. 복수초, 생강나무, 산수유, 개나리 등속이 피어나 봄을 알리면 이어서 하얀 꽃들이 피기 시작합니다. 매화, 목련, 벚꽃 등. 이어 보라색 꽃들이 앞다퉈 피어나는데 이맘때 피는 꽃들 대부분이 보라색을 띠고 있습니다.

화야산에서 보라색꽃의 첫 신호탄으로 산현호색을 만나고 얼마 후, 산비탈도 모자라 등산로까지 침범한 얼레지를 만났습니다. 아침이라 얼레지는 꽃잎을 한껏 뒤로 젖히고 꽃술을 땅바닥을 향한 특유의 자세가 안나옵니다. 이제 막 기지개를 켤 듯 바닥을 향한 꽃잎이 수평을 이루고 있습니다.


세수도 안 한 얼굴 보여주기 싫었을까요? 얼레지꽃은 산 속을 꽤나 넓게 점령하고 있습니다. 화야산은 계곡이 참 깊고 넓기로도 유명합니다. 여름이면 수많은 피서객들로 북적였던 계곡은 지금은 여유롭게 흘러가는 계곡물 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을 뿐입니다.

a 2006년 4월 기지개를 켜고 있는 얼레지.

2006년 4월 기지개를 켜고 있는 얼레지. ⓒ 김선호

계곡가에 서 있는 나무들은 풍부한 수량에 힘입어 일찌감치 연두빛 신록을 피워냈습니다. 덕분에 계곡가 풍경은 주변 산에 비해 한결 싱그러운 느낌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화야산 계곡은 등산로를 점령하면서 흘러가는 길목이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계곡이 먼저고 등산로는 나중일 테지만 물이 흘러가는 길목에 어쩔 수 없이 등산로가 이어진 데에는 나름대로 까닭이 있었겠지요?

때문에 여름에 계곡의 수량이 늘어날 때면 어김없이 그곳을 지나면서 등산화를 적시는 경우가 생기는데요, 지난 여름 우리가족은 아예 신발을 벗고 계곡을 건너면서 대체 몇 군데나 그런 길이 있나 하고 세어 보았습니다. 열 군데가 넘더군요.

물론 물길로 해서 등산로가 끊긴 곳에는 사람들이 건너갈 수 있도록 징검돌이 놓여 있긴 합니다. 그래도 물길은 자주 징검돌을 넘어뜨리고 물길을 만들어 놓고는 합니다.

그러니, 그곳에 가시거든 누군가를 위해 편편한 징검돌 하나 놓고 오는 센스를 발휘해 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렇게 징검돌 건너 물길을 건널라치면 어디선가 목탁소리에 스님 독경소리가 실려옵니다. 머지 않은 곳에 '운곡암'이라는 산 속의 작은 암자가 보이는데, 그곳에서 잠시 다리쉼도 하고 식수도 보충할 수 있습니다. 절 앞에 돌확이 놓여있고 작은 도롱이를 통해 쫄쫄 흘러내리는 약수는 달고 시원합니다.

약수 한 잔 들이키고 절 마당도 둘러 봐야 합니다. 마당에 작은 화단이 있는데 철마다 이쁜 꽃들이 화단을 가득 수놓곤 하기 때문이지요.

절 마당 화단에서 이번엔 금낭화를 만났습니다. 금낭화 꽃밭이라고 해야 옳을 정도로 만개한 금낭화가 화단을 가득 메웠습니다. 분홍색에 가깝지만 금낭화도 보라색 꽃입니다.

암자에 불과한 이 작은 절 집에 매우 특이한 대웅전 건물이 눈길을 끕니다. 농가 한 채를 그대로 옮겨다 놓고 안방 앞에 '대웅전'이라는 현판을 써 놓은 모양새인데 대청마루까지 딱 시골집 그대로입니다. 한 술 더 떠서 대청마루 오른편 구석에 범종을 세워 두었는데 꼭 장난감 같은 크기의 앙증맞은 범종이 떡 하니 버티고 있는 운곡암의 대웅전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오고는 합니다.

대웅전 건물이라기보다 여염집 같은 대청마루에 앉아 앞산을 바라보며 다리쉼을 합니다. 앞산 가득 진달래가 붉게 피어있습니다. 화야산의 진달래도 지금이 한창입니다. 들꽃들의 행렬이 잠시 멈춘 산 중턱에 그렇게 진달래가 꽃잔치를 벌이고 있어 심심하지 않습니다.

a 2006년 4월 산속의 작은 암자에 핀 금낭화.

2006년 4월 산속의 작은 암자에 핀 금낭화. ⓒ 김선호

a 소박하기 그지없는 운곡암의 '대웅전'.

소박하기 그지없는 운곡암의 '대웅전'. ⓒ 김선호

연두빛 새순들도 산 중턱을 올라오지 못했습니다. 그곳은 아직까지 초봄에서 늦겨울 사이를 나고 있는 듯합니다. 봄꽃들이 잠시 주춤하다 싶었는데 주 능선을 앞둔 지점에 유난히 잎이 넓은 풀이 눈에 띕니다. 가축이 먹으면 미치게 된다는 '미치광이풀'입니다.

미치광이풀도 보라색꽃을 피우는 모양인지 종모양의 보라색 꽃봉오리를 주렁주렁 달고 있습니다. 분명 꽃을 피우는 풀이건만 잎이 넓은 외양 때문에 꽃이라 부르기에 다소 무리가 있을 정도로 투박한 풀입니다.

7부 능선에서부터 정상까지 주 능선은 여전히 겨울인 듯합니다. 등산로 양편으로 줄지어서 있는 진달래도 아직 꽃피울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겨울눈 껍질을 그대로 이고 있네요. 하지만 그곳에도 꽃이 피었습니다. 두터운 낙엽 층을 뚫고 피어난 '노루귀꽃’입니다. 잎이 노루귀를 닮았다는데 화야산의 노루귀꽃은 이제 막 개화를 시작한 꽃대 위에 꽃송이만 달려 있어 노루귀를 확인해 보기에 아직 일러 보입니다.

주변에 꽃 한송이 없고 여전히 찬바람이 기세를 떨치고 있는 산꼭대기에서 살아가기에 너무도 여려 보이는 노루귀꽃입니다. 어쩌자고 그런 척박한 곳에서 일찍 꽃을 피우게 되었는지 노루귀는 알고 있을까요?

솜털이 보송거리는 노루귀꽃은 추위에 떨고 있는 새끼노루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얼른 따뜻한 봄이 와야 할텐데요, 올 봄은 꽃샘추위는 유난스럽기만 합니다.

a 2006년 4월 화야산에 갓 피어난 노루귀꽃.

2006년 4월 화야산에 갓 피어난 노루귀꽃. ⓒ 김선호

능선을 타면서 심심해진 아이들이 '단어 거꾸로 말하기' 놀이를 합니다. 올챙이는 '이챙올'이 되고 진달래는 '래달진'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단어로 변신합니다. 누군가 입에서 '화야산'이 나오니 '산야화'라는 그럴 듯한 단어가 탄생합니다. 산야화는 '산에 피는 꽃'으로 해석이 가능하겠지요? 들꽃이 다투어 피어나는 화야산은 지금 '산야화' 세상입니다.

화야산 정상에서는 삼평(三平·청평, 가평, 양평)이 다 내려다보입니다. 그 사이를 북한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는 정경도 한눈에 들어오네요. 하늘이 파란 탓인지 대기가 깨끗한 탓인지 북한강이 마치도 커다란 사파이어 덩어리 같습니다.

화야산 정상에서 주 능선을 따라 앞으로 내달리니 고동산(650m)입니다(3㎞ 남짓 코스). 고동산에서 하산을 할 때 수입리와 갈라지는 지점에서 삼회리 쪽으로 코스를 잡은 건 차를 주차해둔 큰골과 조금이라도 가까울 것 같아서입니다. 그러나 삼회리쪽 하산로는 잘 정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나무를 벤 그루터기에서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다 겨우 마을 입구에 다달았을 때에는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을 정도입니다. 동선이 조금 늘어나더라도 수입리 쪽으로 내려가야 했던 것이지요. 산을 내려서니 그곳에도 강변 길 따라 벚나무 가로수에서 하얀 꽃구름이 몽실거립니다. 다섯 시간 정도의 산행 후라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수퍼부터 찾았습니다.

강변에 있는 작은 매점에서 과자와 음료수를 사면서 큰골 가는 버스 시간을 물으니 한 시간 반 후에나 있을 거라네요. 버스를 기다리느니 벚꽃놀이 하는 기분으로 거기까지 걸어가자고 합의를 보았는데 가만 듣고 있던 매점의 아저씨가 자신의 트럭으로 태워다 주신답니다.

물론 감사한 일이지만 그렇게 신세를 질 수야 없었지요. 갈 수 있다고 장담을 하고 나서는데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습니다. 다섯 시간 산 속을 걸었는데 이 정도쯤이야 싶었지만 길은 외길이요, 가도 가도 똑같은 아스팔트길은 결코 만만치 않았지요.

벚꽃도 아름다웠고, 길 바로 아래 북한강은 햇살을 받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지만 30분쯤 걷고 나니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그때 마침, 트럭 한대가 달려오더니 우리 앞에 멈췄습니다. 매점에서 보았던 그 아저씨입니다. '아직도 한참 남았으니 타고 가세요' 더 이상 사양하면 이 친절한 아저씨가 무안하겠지요.

덥석 트럭에 올랐습니다. 짐칸에 타겠다는 아이 둘을 운전석 옆자리에 앉혔더니 그새 아저씨와 아이들이 친해졌던 모양입니다. 굳이 큰골 안으로 들어가 화야산 주차장까지 데려다 주신 아저씨는 꼭 한번 놀러 오라며 전화번화를 주십니다. 두릅이 한창이라며 아저씨가 손수 가꾸신 두릅을 함께 따자 십니다.

초장에 찍어먹으면 새콤달콤한 맛이 그만인 두릅은 생각만으로 군침이 돕니다. 아무래도 이 친절한 아저씨를 만나러 다음주 즈음엔 다시 한번 화야산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 참 맞는 말입니다.

a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수 있음을 가르쳐준 '트럭 아저씨'.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수 있음을 가르쳐준 '트럭 아저씨'.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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