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에서는 식민사관이 극복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사대’나 ‘당쟁’ 등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 관념들이 상당히 많이 극복되고 있다.
그런데 과거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 민족의 역사만 왜곡한 게 아니다. 일제는 20세기 초반의 한국인들이 서양을 잘못 인식하도록 하는 데에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서양의 이미지 중 상당 부분은, 일제가 의도적으로 한국인들의 머리에 주입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초반의 한국인들은 주로 일본을 통해 서양의 이미지를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일본의 눈으로 서양을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유럽 강국 독일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 역시 일본의 영향 하에 조작된 것이다.
지난 4월29일 서울여자대학교 인문사회관 3층 영상세미나실에서는 ‘수선사학회 춘계 학술대회’가 열렸다. 수선사학회(회장 이원명 서울여대 교수)와 서울여대 사학과가 공동 주최한 이 날 학술대회에서 부산교육대학교 고유경 연구교수는 <근대 계몽기 한국 언론매체에 나타난 독일>이라는 논문에서, 오늘날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독일의 이미지가 20세기 초반 일본에 의해 형성된 것임을 밝히는 논문을 발표했다.
일제의 한국 강점이 임박한 1910년 이전 한국 언론매체에 나타난 독일의 이미지는 당시 한국인들의 열망과 위기의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이 시기 한국 언론에 나타난 독일의 이미지는 주로 ‘문명’과 ‘영웅’이었다.
‘문명’의 이미지가 강조된 것은, 이 시기 한국 지식인들의 화두가 근대화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웅’의 이미지가 강조된 것은, 이 시기 한국인들이 국난 극복을 위한 영웅을 갈망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인들은 ‘문명 선진국 독일’의 이미지를 수용하는 가운데에 ‘독일의 영웅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문명국 독일’을 수용하면서 ‘독일 영웅들’도 함께 수용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 한국에 소개된 독일 영웅들은 당시의 한국에 꼭 필요한 영웅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고유경 교수는 이 때 소개된 영웅들은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데에 이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당시의 한국인들을 매혹시켰던 독일 영웅들인 프리드리히 대왕, 몰트케, 비스마르크 등은 한결같이 부국강병의 주역들이었다. 그들은 부강한 독일 제국주의의 건설에 기여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한국 지식인들은 프리드리히나 비스마르크가 부국강병을 이룩한 영웅이라는 점만 보았을 뿐, 그들의 치적이 내포하고 있는 제국주의적 함의까지는 간파하지 못했다는 것이 고유경 교수의 지적이다.
한국에 소개된 독일 영웅들은 주로 제국주의적 인물들
독일 제국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당시의 한국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투를 무의식적으로 은연중에 수용할 수 있는 지적 토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투를 위해 미리 ‘길’을 닦아두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는 한국인들의 의식을 조작하려는 일본의 의도와, 일본 서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던 당시의 일부 계몽적 지식인들의 무감각이 결합된 결과라는 것이 고유경 교수의 지적이다.
고 교수는 당시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영웅은 ‘제국주의를 추진하는 인물’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인물’이었다고 강조했다. 당시의 한국인들에게 진짜 필요한 영웅은 비스마르크 같은 사람보다는 빌헬름 텔 같은 저항적 인물이었다고 고 교수는 주장했다.
그리고 이 날 방청석 청중이 지적한 바와 같이, 20세기 초반에 형성된 독일의 이미지는 아직도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다시 말해, 아직까지도 한국인들은 일본의 눈으로 서양을 보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서두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날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서서히 일제가 청산되고 있다. 우리 머릿속에서의 일제 청산을 더욱 더 가속화시키려면, 일본에 의해 조작된 우리 자신에 대한 이미지뿐만 아니라 일본에 의해 교묘히 주입된 서양에 대한 이미지도 다시 한 번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실린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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