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남편

그가 '유죄'라고 할 수 있을까... 남편의 아내 살해로 불거진 안락사 논쟁

등록 2006.05.01 23:05수정 2006.05.02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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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며... 사랑했기에

a <달라스모닝뉴스> 4월 29일자 1면. 중앙에 흰부분이 로버슨 부부의 사건을 다룬 기사. 법원의 보석 결정으로 제임스씨가 두 경관의 부축을 받아 나오는 사진이 보인다.

<달라스모닝뉴스> 4월 29일자 1면. 중앙에 흰부분이 로버슨 부부의 사건을 다룬 기사. 법원의 보석 결정으로 제임스씨가 두 경관의 부축을 받아 나오는 사진이 보인다. ⓒ 달라스모닝뉴스 PDF

남편이 아내를 살해했다. 그들은 미국인이자 백인이고, 올해 83세의 동갑내기 노인이자 60년을 같이 지냈다. 그들은 말할 수 없이 서로 사랑했다.

단편적이고 제한적일 수 있겠지만, 이 부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가는 시대, 마음을 다해 혼인 서약을 지키고자 했던 한 사내가 비극적인 고통을 선택한 현실 속에서 '사랑'을 다시 생각한다.

"나 제임스 로버슨은 메리 존스톤을 아내로 맞아 지금부터 영원토록 좋을 때나 힘들 때나,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사랑하고 아끼겠습니다."

#2. 사건개요...
병든 아내, 죽음을 앞둔 남편


지난 25일(화) 오전 10시경, 미 텍사스주 달라스의 주택에서 한 할머니가 총에 맞아 숨졌다. 피살자는 메리 로버슨(83)씨. 그녀를 발견한 의료 도우미는 즉시 그 할머니의 딸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 딸은 911 응급전화로 이 사실을 신고했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했을 때 현장에는 남편인 제임스 로버슨(83)씨가 있었고, 경찰은 그를 아내 살해 혐의로 체포해 달라스 카운티 감옥에 가뒀다.

현장에 출동한 수사관들은 범행에 사용한 권총을 발견했고, 남편에 의한 부인의 '안락사'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출입문에 남겨진 쪽지에 의하면, 제임스씨는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할 계획을 세웠다. 아내를 먼저 겨눈 방아쇠는 자신에게도 향했지만 권총이 고장 나 미수에 그쳤다.


달라스 카운티 검사실은 피의자인 제임스씨가 몇 개월밖에 수명이 안 남은 상황에서 이 사건 재판의 속행에 대해 말하는 것은 너무 빠른 감이 있다고 밝혔다. 즉, 이 사건이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병약한 제임스씨가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26일(수), 제임스씨는 2500달러(한화 약 230만원)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살인사건의 보석금치고는 굉장히 낮은 금액이었다. 보석 결정 후 이어지는 언론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3. 그들은 누구?... 최고의 이웃이자 훌륭한 부부

메리와 제임스의 만남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달라스에 있는 애덤슨 고등학교에서 친구로 만나 연인이 된 것이다. 제임스는 학교의 만능 스포츠맨이었고 메리는 학생회 임원이자 여러 모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스타였다.

고교 졸업 후 메리는 북텍사스 주립대학에 진학했지만 제임스는 전화회사에 취직하는 길을 택했다. 그 사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공군에 입대한 제임스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달라스로 돌아온 그는 자신을 기다리던 메리와 꿈에 그리던 결혼을 했다. 1946년 2월 16일, 달라스에 있는 성공회 성육신 성당에서였다.

전쟁은 그들의 삶을 지연시켰지만, 그들은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갔다. 결혼 후 다음해에 아들 제임스를 낳았고, 몇 년 후에는 딸 샐리도 낳았다. 여느 미국인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삶이었다.

로버슨 가족은 지금 살고있는 동네에 첫발을 디딘 주민이었다. 이어서 이사해오는 이웃들을 따뜻하게 맞이했고 그들과 함께 살며 인심을 얻었다. 많은 이웃들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로버슨 가족을 최고의 이웃이자 훌륭한 부부였다고 회상했다.

이 부부에게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1991년, 메리씨에게 중풍이 찾아오면서부터다. 딸인 샐리씨에 의하면, 아버지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네가 나를 도와주어야만 한다. 전에는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이젠 내가 해야 한다.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내가 해야하는 모든 것을 다 가르쳐 다오."

그렇게 시작된 병간호를 그는 하루도 빼지 않고 정성으로 했다. 병상에 누워있는 사랑하는 부인을 씻겨주었고, 머리를 손질해 주었으며, 입에 음식물을 넣어 주었다.

중풍 후에도 로버슨 부부는 여전히 활동적이었다고 한다.

"가족 여행도 갔고 외식을 하러 나가기도 했다. 단지 예전에 비해 시간이 좀 더 걸렸을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었다."

샐리씨의 말이다. 그러나 작년부터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두 번째 중풍으로 인해 메리씨는 몸을 전혀 가누지 못하게 되었고, 제임스씨마저 말기 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이후 로버슨 부부는 집에 틀어박혀 지낼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씨가 더 이상 부인의 병수발을 할 수 없게 되자 사람을 구했고, 간병인은 아침에 한번 집을 방문해 그들을 도왔다. 딸 샐리씨도 거의 매일 방문하고 거들었다. 그러나 제임스씨의 병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그의 병은 폐암으로 발전했고 치료를 위해 방사선치료와 화학요법을 병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견이 너무 늦어 암은 뇌까지 전이되었다.

이 모든 일을 옆에서 지켜본 딸 샐리씨는 아버지를 "어머니에게 완전히 헌신한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아버지는 결혼할 때 어머니를 항상 돌보겠다고 서약했고, 그는 그 약속을 지켜냈다"고 덧붙였다.

a <달라스모닝뉴스>에 실린 기사. 고등학교 동창인 로버슨 부부의 학창시절 사진들이 보인다.

<달라스모닝뉴스>에 실린 기사. 고등학교 동창인 로버슨 부부의 학창시절 사진들이 보인다. ⓒ 달라스모닝뉴스


#4. 사람들... "그는 무죄"

이 충격적인 소식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50년 이상 이 부부를 알아왔다는 한 이웃은 그의 인내심과 그가 택한 방식에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현재 제임스씨는 계속 쇠약해지고 있다. 그와 같이 있는 딸 샐리씨는 "현재 아버지는 괜찮다"면서 사람들의 태도에 놀라움을 표했다. 경찰도, 감옥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사람들이 놀라우리만치 잘 대해주었다고 한다.

이웃들의 반응도 비슷하다. 비보에 충격을 받았지만, 제임스씨를 동정하는 분위기다. 사건이 일어나기 열흘 전에 그의 집을 방문했다는 한 이웃은 "제임스씨가 겨우 말할 수 있을 만큼 허약해진 상태지만 의식만큼은 또렷하다"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고 전했다.

그의 집 길 건너에 살고 있는 빌리 애덤스씨는 "만약 자신이 그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한다면 무죄를 선고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5. 왜?... "아내가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하지는 않을 것"

지역 일간지인 <달라스모닝뉴스>는 이 사건을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세대의 위대함과 그들이 가진 두려움을 보여주고 있다"고 소개했다. 경찰들은 이 사건의 동기에 대해 "제임스씨가 자신이 죽은 후 부인이 요양원으로 보내지는 것을 원치 않았거나 아니면 자신의 도움이 없는 상황에서 부인 혼자 살아가는 안타까운 상황을 원치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그의 추측은 딸인 샐리씨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그녀는 이 사건이 "암 발병이나 약물 혹은 그 어떤 다른 이유도 아니"라고 밝히면서 "오히려 예전에 어머니가 잠깐 머문 요양원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제임스씨는 "내 아내가 마지막을 그런 식으로 보내게 하지는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자신 역시 혈관의 경화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는 샐리씨는 "질병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버지 자신이 잘 아셨다"면서 "아버지는 내가 어머니를 돌볼 수 없을 것과 그가 죽고 나면 어머니는 결국 요양원에 들어가게 될 것을 아셨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도록 했다"는 것이다.

#6. 진단... 대공황을 견뎌낸 세대의 확고부동한 책임감

전문가들에 따르면, 미국인들 가운데 제임스씨 연배의 많은 이들이 비슷한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다. 알츠하이머병 환자와 가족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한 의대 교수는 "노인들이 불확실한 건강 상태에 놓였을 때 배우자들이 적절한 도움을 주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면서 "누가 그들을 돌보아야 하는가는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밝혔다.

미국에서는 중풍과 치매 등 만성질환을 앓는 노인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요양원(Nursing Home)이 활성화돼 있지만, 적지 않은 노인들이 요양원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 이들이 자신의 배우자에게 "절대로 당신을 요양원에 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이전의 노인 세대와 크게 다른 점이다. 현재의 노인층은 미국의 대공황을 겪은 세대로서 확고부동한 책임감으로 살아온 생활 방식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이것은 내 일이고 누구도 이 일을 대신 하지 못한다"는 삶의 방식이 배우자에 대한 헌신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좋을 때나 힘들 때나 함께 하겠다고 혼인 서약을 했고, 비록 이것은 힘든 때지만 이마저도 자신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도 결국 외부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처럼 배우자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과 배우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람은, 최소한 그런 선택을 통해 이 삶 이후에도 영원히 함께 할 것을 바란 것이다.

아마도 제임스 로버슨씨도 그것을 의도했을 것이다. 비록 애초에 생각했던 바대로 이루지는 못했지만.

#7. 논란... '존엄한 죽음' - '생명의 신성함'

a 제임스 로버슨씨.

제임스 로버슨씨. ⓒ NBC5

인구조사국 발표에 의하면 오는 2030년에는 미국 내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현재의 2배로 급증하는 등 미국사회의 노령화가 급격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러한 노인 인구 증가와 발맞춰 '베이비 부머' 세대가 이미 60살이 넘은 지금, 질 높은 삶과 보살핌 그리고 존엄을 잃지 않는 죽음이라는 문제가 현실적으로 대두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이번 사건이 아닐까 싶다.

딸 샐리씨의 말이다.

"만약 당신이 남을 사랑하는 인간이라면, (제임스씨가 경험한) 그 상황에서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를 것이다. 아버지가 안하셨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러나 그는 했다.

나는 질 높은 삶과 존엄한 죽음을 굉장히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이 바로 이 나라가 관심을 가지고 다뤄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만약 누군가는 그런 삶과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면 괜찮다.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결정이니까. 그러나 원하는 이들에게 존엄한 죽음은 반드시 가능해야 한다."

제임스씨의 행동은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엄청난 법적·윤리적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존엄한 죽음(death with dignity)'대 '생명의 신성함(sanctity of life)'이라는 다소 고전적인 주제가, 사랑을 매개로 인생의 마지막 여정에서 다시 맞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8. 다시 시작하며... 그 영혼이 평안하기를

지난 주말, 별 생각없이 받아든 조간신문을 보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묵은 안락사 논쟁의 부부 버전일 수도 있는 이 지난한 문제에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나 역시 결혼을 하고 한동안 생각해 보았던 문제다. 가끔씩 해외토픽에 등장하는, 평생을 해로하고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함께 자연사한 부부를 보고 동경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 부러움의 밑바탕은 제임스씨가 고민하던 문제와 본질상 같을 지도 모른다.

우리네 인생에서 뜻대로 되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많던가. 시간이 흘러 로버슨씨 부부의 이름이 묻혀지고 이 사건은 잊혀지겠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을 이루려 한 사람쯤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건강 탓에, 제임스씨는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 대해 인간의 법정에서 판결을 받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러나 신의 법정에서 그는 어떤 판결을 받게 될까? 쇠약한 육신에 깃든 그의 영혼이 평안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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