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신보다 가족이 더 소중하다"

아이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 돈, 친구... 가족이 가장 소중

등록 2006.05.06 17:57수정 2006.05.07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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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길
생각의 길안준철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 날이었다. 시험문제를 풀어주고 점수를 확인해주고 나니 다음 단원을 나가기에는 남은 시간이 어중간했다. 미리 예상을 했던 일이라 책상을 깨끗이 치우게 하고 준비해온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주었다. 거기에 영어로 무언가를 적게 하고, 또 지우게도 했다.

5분쯤 흘렀을까? 교실 여기저기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억울한 일을 당한 듯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는 아이도 눈에 띄었다.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제법 비장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아이도 있었다. 도대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그날 나는 아이들에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 여섯 가지를 종이에 적어보라고 했다. 그것이 뭐 대단한 일이라고 한숨까지 내쉬고 난리를 떨었을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여섯 가지 중에 덜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지우라고 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똑 같은 주문을 두 번 세 번 반복하자 삽시간에 교실 풍경이 달라진 것이었다. 배 멀미를 심하게 앓고 있는 듯한 아이들에게 나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자기가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여섯 가지를 종이에 적었어요. 거기에서 하나를 지우고, 또 하나를 지우고, 또 하나를 지우고, 나중에는 가장 소중한 것 딱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했지요? 한숨 소리가 들리고 하는 것을 보니 많은 갈등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여러분의 마음의 움직임을 그대로 글로 옮겨보세요.”

이런 일종의 집단상담은 아이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또한 글쓰기를 싫어하거나 겁을 내는 아이들에게 방금 전에 자신이 체험한 구체적이고 생생한 내용을 글로 옮겨보게 함으로써 글쓰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장점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한 번도 이런 생각을 진지하게 해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라면 모처럼 생각의 시간을 갖게 해주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 아이는 가족과 여자친구 사이에서 고민을 한 듯했다. 결국 여자친구가 최후의 경쟁에서 살아남았는데 그래도 가족에 대한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던지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내가 여자친구를 선택한 것은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로 인하여 가족이 생길 것이고….’

돈을 여섯 가지 중 하나로 선택한 아이들이 많았지만 최후의 선택으로 돈을 지목한 아이는 둘 뿐이었다. 돈과 함께 친구, 집, 가족 등을 적었다가 돈을 세 번째로 지우고 가족을 마지막으로 선택한 아이는 종이에 이렇게 썼다.


‘마지막으로 가족을 선택한 이유는 음… 손이 가더라.’

한 아이는 가족 대신 엄마를 선택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다른 가족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종이에 빼곡히 적어놓은 글을 읽어보니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추억의 사진 한 장
추억의 사진 한 장안준철
‘첫 번째로 memory(추억)를 지울 때는 조금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내가 추억을 되짚어볼 때 좋은 추억보다는 힘들었던 일 슬프고 아팠던 일이 더 많았다. 애써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나쁜 추억들을 이 시간 잠시 동안만이라도 지우고 싶다. 나에게 제일 소중한 것은 mother. 사실은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싫은데… 좋다. 이상하다. 엄만 목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나 때문에 너무 많은 고생을 한 엄마. 제일 싫지만 내가 꼭!! 지키고 싶은 사람이다.’

한 아이는 남학생인데도 마음의 움직임을 제법 섬세하게 그려냈다. 아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K-1, 음식, 가족, 사랑, 돈 등이었다. 그 중 두 번째로 K-1을 지우고 ‘할 수 없이 지웠지만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끝맺음을 했다.

3개 중 마지막 가족과 돈, 음식, 사랑 중에서 하나를 더 지워야하는데 여기서 고민이 되었다. 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인데 무엇을 지워야 한담. 할 수 없이 돈을 지웠다. 돈은 또 벌면 될 테니까. 이제 되었다 생각했는데 선생님께서 남은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고르라고 하신다. 너무 잔인하신 영어선생님! 나는 고민하다가 love를 택했다. money는 없어도 살 수 있을 것이고 가족은 언젠가는 쇠퇴할 것이기에. 하지만 내가 love를 택했다고 해서 family나 food가 소중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동성친구와 이성친구 사이에서 고민하는 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돈, 여자친구, 헤어스타일, 사랑, 휴대폰, 친구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마지막으로 친구에 동그라미를 친 아이는 그 때의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cell-phone을 지운 이유는 전화기는 필요하지만 위에 쓴 것 중에는 제일 필요하지 않는 것 같다. 다음 hair style을 지운 이유는 머리는 언제든지 길 수 있으니까. girl friend를 지운 이유는 사랑보다는 우정이다. 마지막으로 친구를 선택한 이유는 돈만 있다고 진정한 친구를 사귈 수는 없는 것 같고 여자 친구도 사귀지 못할 것 같고 사랑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사람과 동물 사이에서 고민하는 아이도 있었다. 적어놓은 글을 읽어보니 첫 번째로 컴퓨터 게임을 지울 때는 한숨을 쉬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두 번째로 애완동물을 지울 때는 사정이 달라졌다. 아이의 떨리는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두 번째는 pet를 지웠다. 아, 너무나도 고민이 되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친구를 버릴까 내 애완동물을 버릴까. 친구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내 애완동물을 버렸다. 세 번째는 친구를 버렸다. 나를 지울까 친구를 지울까 생각했다. 그냥 친구를 지웠다. 그 다음에 돈을 버렸다. 나 자신과 가족보다 돈이 덜 소중하니까. 그다음에는 나 자신을 버렸다. 내 자신보다 가족이 더 소중하다.’

노를 젓는 아이들
노를 젓는 아이들안준철
아이들이 써놓은 글들에는 모두 나름대로의 진지함과 고민과 익살이 담겨 있었다. 요즘 아이들을 흔히 ‘생각 없는 아이들’이라고 낮추어 말을 하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그런 생각을 바꾸어야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정말 생각 없는 아이들이라면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수업을 끝내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이 더 소중한가를 놓고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겠지만 오늘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가치관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진 거예요. 앞으로도 여러분 스스로 이런 시간을 자주 갖기 바랍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정말 쓸모 있고 가치 있는 인간이 될 테니까요.”

이제 글을 마치려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미처 소개하지 못한 글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달라도 나름대로 귀담아 들어볼 내용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이 써놓은 글을 몇 편 더 소개할까 한다. 학교와 가정에서 학생들과 자녀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다 쓰고 나서 선생님이 지우라는 말을 하기에 love을 지웠다. 두 번째는 나보다 다른 것이 더 소중했기 때문에 myself를 지웠다. 부모님은 날 낳아주셨고, 친구는 나의 성격을 만들어 주었다. 추억은 내가 생각할 수 있고 꺼내어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도 소중하지만 난 그것들로 인해 포기할 수 있었다.’

‘사랑을 하면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사랑을 선택했다. 하지만 인생은 사랑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첫 번째로 사랑을 지웠다. 건강은 사람마다 아프고 우리가 열심히 운동하고 그러면 모두 건강하기 때문에 지웠다. 사진은 살아 있을 땐 간직하고 볼 수 있지만, 죽어서는 보지는 못하기 때문.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가족이다. 가족이 없었다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 선택은 가족과 예수님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했다. 둘 다 지우지 않았으면 했다. 만약 다 지운다 해도 그 두 가지는 내가 절대 버릴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인물 중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첫 자식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냈기에. 너무 가슴 아픈 선택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진을 선택한 것은 내가 자라온 흔적들과 가족, 그리고 엄마, 아빠 웨딩사진까지 죽을 때 가져가고 싶다.’

‘지울 때 좀 아쉽긴 했지만 내가 선택한 거니까 후회는 없다. 역시 누가 뭐래도 가족이 최고인 것 같다. 내 자신도 소중하지만 가족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넓은 마음을 가져야겠다.’

‘날마다 짜증내고 싸우고 하지만 어디가나 생각나는 게 가족이다. 가족이 없으면 사는 게 재미없으니까.’

‘나는 사람에 동그라미를 쳤다. 처음엔 가족, 친구, 남자 친구 등을 따로 썼는데 하나를 포기하라니? 그러질 못해서 다 포함해서 사람들(people)이라고 다시 고쳐 썼다. 혼자라면 못 살 것 같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과 친구이다. 건강이 좋아도 가족과 친구가 없으면 마음이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6개 중 가장 지우기 힘들었던 것은 바로 ‘Myself 이다. 그래도 나머지 것이 있기에 힘들지는 않는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할머니의 유품(relic, memento)이다. 어렸을 때 할머니를 잘 따랐고 할머니 댁에도 잘 놀러가고 잘 해주시고 내가 가장 제일 사랑하는 할머니인데 돌아가셔서 유품만 남았기 때문에 가장 소중하다.’

환한 저 꽃처럼 우리 아이들도 환했으면 좋겠습니다.
환한 저 꽃처럼 우리 아이들도 환했으면 좋겠습니다.안준철
아,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하나님과 가족과 학교 아이들 사이에서 고민을 할 것 같다. 그러다가 결국은 아이들을 선택하지 않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고귀한 생명을 주시고 사랑하는 가족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이다. 물론 ‘아이들’이다. 그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게 주신 모든 행복을 다 거두어 가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이 불쑥 들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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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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