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누굴 찍어야 하나
마당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골목어귀에서 곱게 차려입은 한 아주머니가 손에 한 줌 뭘 들고 목패를 덜렁대며 오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허리를 펴고 일어서서 나와 내기를 하기 시작했다.
여호와의 증인? 아냐. 여호와의 증인들은 혼자 안 다니던데. 보험설계사? 글쎄? 양로원 같은 시골마을에 권할 만한 보험이 있을라구. 아니야. 혹시 선거운동원? 그랬다. 선거 운동원이었다.
벌써 세번째 방문객이다. 1주일 사이에 우리 집에 명함을 들고와서 찍어달라고 한 표 부탁하고 간 선거운동원들이 세번째인 것이다. 수고하신다는 인사말을 건성으로 주고받으며 나는 명함 한 장을 받아들었다.
성의를 물리칠 수 없어 명함을 꼼꼼히 훑어보지만 믿음이 가지 않는다. 유명한 시민단체인 '경실련'을 흉내 낸 '시민연대경실련 정책국장'이라니, 처음 듣는 단체다. 그럴듯한 이력을 내세우는 후보들의 자화자찬이 가관이다.
어제 우리 집에 들른 아무개 후보의 운동원들은 말로만 듣던 대로 그 후보가 돈 많은 후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젊디젊은 남녀 대학생들이 4명이나 빨간 유니폼을 똑같이 차려입고 찾아 왔었다. 나는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어린 학생들에게 내색 할 수가 없어 성의 없이 인사를 나누고 돌려보냈다.
그 후보는 현직 군의원으로 1주쯤 전에는 부인과 딸을 우리 동네에 보내서 집집마다 인사를 하게 했었다. 나는 그 부인과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최소한의 믿음마저 놓아야했다. 그 군의원은 우리면의 우체국장이고 부인은 사무장이라 이틀이 멀다하고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이다. 그 군의원은 2년 전인가 뇌물공여죄로 법정에 선 사람이다. 군 의회 의장이 되려고 의원들에게 1500만원씩 돈을 돌렸다가 당선이 안되자 그들과 언쟁을 벌이다가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고 한다.
전라도에서는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열린우리당 공천이 어려웠나보다. 이번에는 민주당 공천을 받아 출마했던 것이다. 부인과 딸이 출마를 만류했으려니 하는 근거 없는 상상을 하며 위안을 삼으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불법 선거운동으로 돕고 있다니 얼마나 실망스런 일인가. 유권자의 집을 찾아다니는 것은 후보 본인도 할 수 없는 불법선거운동인 것이다. 내가 최소한의 믿음마저 놓아야 했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주에는 전주시내의 어느 후배에게서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들어야했다. 전주시평생학습센터에 도의원 후보자인 김아무개가 왔는데 강의실에 들어가 명함을 돌리려고 해 안된다고 했더니 대뜸 한다는 말이 "이곳 예산을 깎아버리겠다"고 막말을 했다는 것이다.
김아무개 후보는 정치지망생으로 시민단체 간부도 맡고 있고 지역의 참 언론임을 내세우는 어느 언론사의 편집위원도 맡고 있는 사람으로, 이번에 열린우리당 공천을 따 내서 당선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었다. 한때 운동권에 몸담아 투옥도 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그는 역시 내가 잘 아는 후배였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에 입후보한 후배 한 사람한테서는 문자가 이틀이 멀다하고 오는데 어제는 "돈 없어도 서럽지 않은 세상을 만들어 가겠습니다"라고 왔다. 나는 픽 웃었다. 이 친구는 나한테 오면 차비를 얻어가는 친구다. 작년부터 하던 사업이 비실비실 하면서 나한테 빚진 것만 해도 50만원 가량 된다.
언젠가 사무실에 들렀더니 문이 꽝꽝 잠겨 있기에 휴대전화로 물어보니 출마준비 한다는 것이었다. 지방의원이 골치 아픈 자영업보다 나아서 그랬을까? 아니면 세상에 대한 불타는 개혁의지가 아직 충천해서 그랬을까?
모두가 자기가 잘 났다고 다툼을 벌이고 있는데 도대체 누구를 찍어야 하나.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분명하지 못한 것이며, 자기가 식견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총명하지 못한 것이다. 자기를 뽐내는 것은 도리어 공을 이루지 못한 것이며, 스스로 잘난 체하는 것은 도리어 여러 사람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스스로를 잘났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했으니 큰 일 났다. 우리나라의 모든 지도자들은 자기가 잘났다고 거짓말과 뒷돈까지 써가며 자랑하는 사람들 아닌가?
또 노자는 말했다.
"강이나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낮은 곳에 잘 처하기 때문이다. 귀한 것은 천한 것을 뿌리로 삼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바탕으로 삼는다."
다 높이 되려하고 천한 것을 멀리하며 낮은 것을 업신여기는데 누구를 찍어야 하나.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걱정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