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에게도 아프가니스탄이 필요한가?

등록 2006.05.28 11:49수정 2006.05.2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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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 1900~1958). 그의 이름을 중고등학교 때라도 한 번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양자역학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 유명한 배타원리(exclusion principle)을 제창하였으며, 중성미자(neutrino)의 존재를 예언하는 등 현대 물리학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대표적인 천재형 물리학자였는데,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창조적인 일을 그다지 많이 하지 못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인간적인 성품은 그리 존경받지 못했다. 그 자신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겠지만 상대방을 무시한다든지 화를 잘 내는 성품은 과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정도이다. 천하의 아인슈타인에게 수학과 물리학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조롱한 사람은 아마 파울리가 유일할 것이다.

파울리는 요즘 유행하는 속된 말로 '왕싸가지'였지만 물리학의 발전에 미친 그의 공로는 그의 '싸가지'와는 별개로 높이 인정받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어떤 과학자가 아무리 싸가지가 없다고 해도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그와 별개로 평가받아야 한다. 반면에 황우석 사건의 예에서 봤듯이 좋은 인상과 감동적인 언사, 예의바른 행동거지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그 주장들이 모두 거짓인 경우도 있다. 과학자들에게 있어 개인적인 이미지란 그의 학문적 업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랜 세월에 걸쳐 과학이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한 명의 과학자를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과학계의 상식에 속하는 일이라 사실 새삼스레 이렇게 언급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2. 이미지 때문에 이득과 손해의 희비가 엇갈리는 대표적인 예는 정치인들일 것이다. 가장 큰 손해를 본 사람은 아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닐까 싶다. 그의 중도우파적 정치성향에도 불구하고 아직 상당수가 그를 아직도 '빨갱이'로 인식하고 있다. 그가 번번이 대선에서 낙선한 가장 큰 이유는 "빨갱이인데다가 그냥 인상이 안 좋아서"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참여정부의 인사들도 여기서 자유롭지가 못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말에 품위가 없다든지, 대통령으로서의 권위가 없다, 혹은 싸가지가 없다는 비난을 숱하게 들어왔다. 적어도 싸가지 없음에 관한 한 유시민 현 보건복지부 장관을 따를 사람은 없어 보인다. 이들 모두 여전히 '친북좌파 빨갱이'로 불리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만큼의 십자포화에 상응하는 '알맹이'에 대한 평가나 고민이 진지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현 정부를 비판하는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십중팔구 '좌파적', '친북적', '싸가지 없음', '무능함'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류의 비판에 가장 열심이었던 것은 <조선일보>였다. 내 생각에, 천하의 파울리라도 <조선일보>에 잘못 걸렸으면 그 이름을 남기기는 힘들었을 게다.


3. <조선일보>. 한일관계의 특수성을 생각해 본다면, 1면 정수리에 천황폐하 사진을 당당하게 게재했던 이 일간지가 2006년 현재까지 대한민국 신문 최고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우리에게 일본은 언제나 "왜 과거에만 얽매여 살려고 하는가"라고 반문하지만, 우리는 과거가 단순히 지나가 버린 일이 아니라 현재와의 대화이며 미래를 향한 디딤돌임을 알고 있다.

"왜 과거에만 얽매여 살려고 하는가"라는 주장은 놀랍게도 <조선일보>의 단골 메뉴 중 하나이다. 참여정부에서 추진했던 과거사 청산 문제를 한결같이 반대한 논리가 바로 이것이었다. "중국이나 다른 경쟁국은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데..."라는 새로운 논리도 추가되었다. 이 논리는 꽤나 힘을 발휘해 왔다. 대통령이 선거법 위반한 혐의가 있는 것을 탄핵감이라며 법치주의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다가도 재벌총수 일가의 탈세나 불법증여, 비자금 조성, 분식회계는 정상참작이라며 오히려 법을 바꾸기를 주문하기에 이른다. 헌법에 위배되는 정도로 보자면야 헌법에 보장된 노조설립을 사실상 가로막고 있는 삼성그룹의 총수 이건희만한 인물이 있을까.


기업들의 이러한 잘못된 관행들을 바로잡자고 하면 '반시장적'이라거나 '좌파적 정책'으로 덮어씌운다. 이렇게 덧씌워진 이미지는 정부의 정책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는 데에 큰 장애요소다. 그러다보니 정부에 대해 정작 중요한 비판은 실종되고 알맹이 없는 껍데기들만 남아서 의미 없는 말싸움만 계속되고 있다.

예전에 제임스 울시 미 CIA국장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겨레신문>은 "해가 서쪽에서 떠도 미국의 음모'라고 한다"면서 불만을 표시한 적이 있는데 지난 몇 년간 <조선일보>의 거의 모든 기사는 "해가 서쪽에서 떠도 노무현 탓"으로 요약된다. 가장 적절한 예가 여기 있다.

a 조선일보의 정부비판 행태.

조선일보의 정부비판 행태. ⓒ 디씨인사이드 과학갤러리



혹시나 친북좌파 빨갱이 정권이 나라를 김정일에게 갖다 바치지나 않을까하는 그 우국충정은 알겠으나 밥 먹듯 변신을 해온 <조선일보>의 역사를 보건대 아마도 적화통일이라도 될라치면 가장 먼저 '김정일 만세'를 외칠 위인들이 바로 <조선일보>가 아닐는지.

최근 강정구 교수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놓고 <동아일보>가 사설에서 "권력과 유착한 좌파세력의 대한민국 정통성 부정으로 시작된 '이념 내전(內戰)'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 사회가 민주적 기본질서 수호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강 교수는 2001년에도 '만경대 정신 이어받자'는 등의 친북 발언을 했다"고 국가보안법의 존속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1998년 <동아일보> 방북 취재단은 김일성의 1937년 보천보 전투 관련 자사 기사 동판을 금으로 떠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서 선물하기도 했다. 내가 보기엔'만경대 정신'보다 그 죄질이 가볍지 않아 보인다. <조선>이 <동아>와 얼마나 다를까.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우리 모두는 그렇게 오랜 세월을, 그리고 아직까지 이들에게 속아왔다.

4.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피습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제 우리도 이만큼은 민주주의 한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라 모두의 마음이 무겁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행동한 박근혜 대표는 칭찬받을 만하다. 정치적으로 오버하지 말라는 그의 당부 또한 정치 지도자로서 매우 사려 깊은 발언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아무리 만주 군관학교 출신으로서 독립군을 때려잡는 데에 앞장서고, 군사반란을 주도했으며 유신독재와 긴급조치를 통해 무수히 많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백색테러를 가했다고 해서 그의 딸이 부당한 대접을 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전쟁당사자가 아님에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한국전쟁에 대해 결국에는 질문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1야당 대표인 박근혜에게 군사독재 시대에 대한 평가와 입장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그런데, 정작 '오버'하고 나선 이들은 <조선일보>였다. 이번 역시 그들이 역사적으로 즐겨 사용해 왔던 '배후'를 다시 들고 나왔다. 광주항쟁 때에도 '폭도'와 '배후'가 등장했었고 87년 민주화 항쟁 때에도 어김없이 배후세력이 신문지를 도배했었다. 효순·미선이 추모 시위에서도 대통령 탄핵반대 촛불시위에도, 그리고 지금 평택 대추리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배후'는 역사의 고비마다 항상 단골이다.

일단 뭔가가 배후와 관련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당사자가 하는 말과 행동을 의심하게 된다. '싸가지 없다'는 이유로 파울리의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는 셈이다. 이번에 나온 '배후'는 예전의 '배후'와 성격이 좀 다르지만 그 실체가 없다는 점과 결국에는 <조선일보>를 이롭게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지난 황우석 사건 당시에도 결정적인 오보들을 내고도 정정기사 한번 제대로 안 냈던 그들의 이력을 떠올려 보면 이런 종류의 '음모론'을 유포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참으로 편리해 보인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편리가 늘어갈수록 국민들의 혼란과 불편함만 그만큼 더 늘어날 뿐이다.

지금까지의 선거구도는 <조선일보>의 기대에 크게 부응하는 것 같다. '배후=여당'이라는 어렴풋한 연결고리와 정권심판론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이 우리 선택의 폭을 매우 좁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그것이 <조선일보>가 바라는 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권을 심판한다는 것이 특정 야당 몰아주기가 아님은 분명하다. 투표용지에는 1, 2번만 있는 것이 아니다.

5. 9·11테러가 났을 때 미 CNN은 온종일 참혹한 테러 장면을 며칠이나 반복해서 내보냈다.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나서, 진상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기도 전에 사람들은 보복전쟁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우연이겠지만 부시에게도 알 카에다의 '배후'가 필요했는지, 가련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가 전쟁의 참화에 쓸려갔다.

세계 유일 초강대국이라는, 다른 모든 나라의 국방연구비보다 더 많은 국방연구비를 쓰는 그런 수퍼 파워 미국이 세상에서 제일 못 사는 나라 중 하나인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다! 마비된 이성은 배후를 찾게 되고 기껏 수백만원 정도 되는 천막을 수십억 원짜리 순항 미사일로 박살내는 기이한 장면을 결국엔 연출해 내고 만다. 대량살상무기를 찾아 없애기 위해 대량살상이 자행되는, 그리고 나서는 '이 산이 아니었나봐'라는 나폴레옹식 우스개 소리 하나로 모든 상황이 무마되는 그런 '황당 시츄에이션'이 과연 남의 나라만의 일일까.

벌써부터 박근혜 대표의 '퇴원장면'이 화제다. 나는 그녀의 상처가 사회 통합과 보다 성숙된 민주주의의 징표로 기억되기를, 그리고 그녀가 빨리 쾌유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테러장면이나 퇴원장면을 반복해서 볼 이유도, 배후를 찾아서 응징할 이유도 없다. 며칠 뒤 투표소로 가기 전에 잠시만 생각해 보자. 우리는 지금 혹시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는 전투기를 타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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