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440회

등록 2006.05.29 08:01수정 2006.05.29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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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의 한이 서린 요서보검은 그녀의 앞가슴을 뚫고 나왔다가 다시 사라졌고, 그녀는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그렇게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 자신의 입에 불과한 존재로 살아갈 가치가 있었던 당새아에게 죽음을 당한 것은 어쩌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필연적인 일이었을지 모른다. 인간에 있어 입이란 존재는 자신을 죽일 수도, 또한 남을 죽일 수도 있는 것.

“...........!”


당새아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져 있는 담천의 쪽을 바라보았다. 능력만 있다면 저 자를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다. 아니 저 자뿐만 아니라 이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죽이고 싶었다. 저 자들 뿐 아니라 지금까지 주인님 곁에 있었던 자들도 모두가 주인님을 죽게 한 공범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네 놈들에게도 피눈물을 흘리게 해 줄 것이야. 오장육부가 끊어지는 이 고통을 네 놈들에게도 반드시 느끼게 할 것이야.....)

아름답게 보이던 세상이 갑자기 잿빛으로 변했다. 어린 가슴이 터져 나갈 듯 남몰래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였지만 그저 어린 가슴에 담아두는 것만으로도 벅찬 사랑이었다. 그 분홍빛 사랑이 이제 꺼진 것이다. 대신 그녀의 가슴속에는 독기와 증오와 원한만이 타오를 뿐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다른 인물들이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고, 또한 너무나 급작스럽게 발생한 방백린의 죽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장내에 담천의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형님들이 이곳의 일을 마무리해 주시겠소? 다만 저들은 약속대로 천마곡과 천동을 나갈 수 없소. 내가 살아있는 한 말이오.”


강명과 구양휘를 번갈아보며 한 말이었다.

“맹주가 할 일은 많네. 저들 손에 잡혀있는 많은 무림동도들과 아직 천마곡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데리고 나가야 하지 않는가? 이곳의 모든 일을 마무리 짓는 사람은 바로 맹주가 되어야 하네. 노도는 맹주가 시키는 일을 마다하지 않겠네.”


무당의 청송자가 대견스럽다는 듯 담천의를 보며 말했다. 담천의가 맹주로 내정되었을 때 불만은 있었지만 비원으로 인하여 하는 수 없이 받아들인 터였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청송자가 다른 이보다 담천의를 믿고 적극적으로 밀었던 것은 태극산수를 익힌 그를 무당이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그는 충분히 맹주로서의 자격이 있었고, 그 아닌 다른 어떤 사람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지금까지 파악한 중원의 정세는 그를 중심으로 무림이 뭉쳐 천동의 세력과 대결전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허나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담천의의 말은 뜻밖이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소생은 이 순간부터 제마척사맹의 맹주가 아니오. 소생이 할 일은 이제 끝났소.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어쩌면 소생은 이 순간부터 여러분들과 적이 될지도 모르오. 나는 더 이상 비원에 이용당하는 존재는 되지 않겠소.”

맹의 인물들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출신과 내력을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그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또 그 말은 어쩌면 정확한 지적일 수 있었다. 비원에서 자신들에게 부탁을 해온다면 담천의와 적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

그 반면에 섭장천과 강명 일행은 엷은 미소를 띠었다. 단지 그가 황실과의, 비원과의 관계를 끊는다 해서만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과거의 모든 미망에서 벗어난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담천의가 자랑스러운 듯 강명이 한발자국 나섰다.

“그래. 자네는 쉬어야 할 필요가 있어. 몹시 피곤해 보이는군.”

강명이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담천의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소제는 지금 손가장으로 가보아야 하오.”

“어차피 손불이와는 자네 뿐 아니라 나 역시 청산해야 할 빚이 있지. 같이 가세나.”

강명이 나섰다. 그의 부친 역시 살천문에 심은 수하를 이용해 모용화천이 살해한 것이 아닌가?

“형님이 원하시면......”

“우리도 같이 가겠소. 맹주가 스스로 맹주직을 버려도 우리는 아직까지 맹주라 생각하오. 극구 아니라 하더라도 손가장으로 가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요.”

황보가의 가주인 황보장성(皇甫長成)이 불쑥 나섰다. 나머지 인물들 역시 그의 의견에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담천의는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들이 손가장에 가시든 아니든 나는 간섭하지 않겠소. 허나 나는 이곳에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소.”

“천의....!”

담천의는 서두르고 있었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독불장군처럼 살아 온 구양휘도 그 정도는 안다. 자칫 지금 담천의의 태도는 좌중을 무시하는 처사로 비칠 수 있다.

“뱃속에 내 아이를 가진 여자가 지금 손가장에 있소.”

손가장의 손불이는 바로 전, 담천의의 손에 죽음을 당한 방백린의 친부(親父)다. 자식을 죽인 자를 용서할 수 있는 부모가 있을까? 부모를 죽인 자보다 용서할 수 없는 존재가 자식을 죽인 자다. 담천의가 서두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문주...!”

담천의는 고개를 돌려 우교를 찾았다. 우교가 뒤쪽에 있다가 앞으로 나서더니 갑작스럽게 담천의를 둘러메었다.

“힘들더라도 참으시오. 내 손가장까지 사흘 안에 당도해 보겠소.”

말과 함께 우교는 담천의를 우악스럽게 둘러멘 모습에 좌중이 어처구니없이 바라보는 시선을 헤치고 그곳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우교가 살천문의 문주라는 사실은 극히 최근에 안 사실. 이상한 것은 두 사람의 관계였다.

“윽.... 정말 우문주는 고약한 호위이구려.”

“빨리 가려면 어쩔 수 있소? 영주 몸이 뭐 새털처럼 가벼운 줄 아시오?”

우교는 분명 담천의의 신변을 은밀하게 호위하는 인물로 보였다. 우교의 충성심도 놀라울 정도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친 사람을 어깨에 둘러매는 사람이나 그에 대해 투덜거리는 사람이나....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는 어느새 멀어져 가고 있었다.

“죄송하오. 본 가주 역시 담맹주를 따라가 봐야겠소. 뒤 일을 부탁하겠소.”

모용화궁이 별안간 청송자와 독고문을 바라보며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는 곧 바로 담천의와 우교가 사라진 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지금 중원에서 가장 복잡한 심사를 가진 인물이 아마 모용화궁일지 몰랐다. 섭장천이 몸을 돌려 대 위에서 내려가며 불쑥 말을 던졌다.

“우리도 여기 있을 필요가 있는가? 가보도록 하지. 자칫 지체하면 우리마저 천마곡에 묶여 있게 될지 몰라.”

그 말에 제마척사맹의 인물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의 쓴웃음을 뒤로 하고 섭장천은 청송자에게 시선을 던지더니 장내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청송자가 그의 뒤로 정중히 도호를 그었다.

------------

기이한 일이었다. 불편한 몸으로 손가장을 향한 담천의와 우교로서는 아주 다행스런 일이었다. 연동을 벗어난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담천의를 기다리는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제공하는 마차는 너무나 유혹적이어서 거절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제공한 마차는 정말 편했을 뿐 아니라 매우 빨랐다. 건장한 말 네 필이 끄는 그 마차는 아마 중원에서 가장 빠른 마차인 것 같았다. 그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렸으며 손가장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번 지친 말을 바꾸기 위해 잠깐 쉬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담천의와 우교는 연동을 벗어난 지 이틀만에 손가장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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