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식
밭에서 일을 하면서 조심하게 되는 것이 여럿인데 그 중에 제일은 지렁이를 다치지 않게 하는 일이다. 작물의 여린 순들도 옮겨 심을 때 여차하면 줄기가 부러지므로 조심해야 하지만 지렁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지렁이가 자연 생태농에서는 가장 큰 일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미나 괭이로 땅을 푹푹 찍지 않고 살그머니 끌어당기는 식으로 일을 하지만 한순간에 지렁이를 반 토막 내는 일이 허다 하여 그때마다 가슴이 섬뜩하다.
이번에는 다른 일로 가슴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앞마당 밭에 거름을 펴고 있는데 거름 속에서 뱀이 나오지 않는가. 놀라서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온 몸에 소름이 끼치도록 놀라 두어 발 뒤로 물러섰다가 제대로 보니 뱀이 아니라 자식보다 더 소중한 지렁이가 아닌가.
아니 이럴 수가. 이렇게 큰 지렁이가 다 있다니.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 정말 지렁이가 맞나 싶어 다시 들여다 보았지만 분명 지렁이였다. 굵기도 새끼손가락만 했다. 지렁이도 당황했는지 꼼짝도 않고 내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뭘 먹었기에 이런 왕 지렁이가 다 있나 싶어서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부리나케 집안으로 가려는데 이놈의 지렁이가 쉭쉭 소리를 내면서 내빼는 게 아닌가.
나는 흙을 한 삽 떠서 지렁이를 덮어 놓고 뒤를 흘끔흘끔 봐 가며 카메라와 줄자를 가져왔는데 처음 있던 곳 흙을 꼬챙이로 파 봤지만 지렁이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도망을 간 것이다.
안 돼. 널 그냥 보낼 순 없어.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다 싶어 차근차근 주변 흙을 뒤집는데 이놈의 꼬리를 내 꼬챙이가 건드렸나 보다. 두더지가 지나가듯이 땅이 들썩 하는 것이었다.
조심스레 지렁이를 끌어내서 줄자를 갖다 대고 사진을 찍는데 가만히 좀 있으면 좋으련만 셔터를 누르려고 하면 몸을 꿈틀대는 것이었다. 부끄러운지 귀찮은지 자꾸만 얼굴을 가리고 몸을 돌렸다.
그래. 카메라에 익숙하지가 않구나. 긴장하지 마라. 플래시도 터뜨리지 않아. 가만 있어봐. 땅 속에서만 살다가 땅 위로 올라오니 햇살도 따갑고 몸도 건조해지고 네가 고통스럽겠구나. 자… 자… 잠깐이면 된다. 빨리 찍고 너도 집에 가야지. 자자 하나아 두울….
나는 어린애 달래듯이 하여 지렁이가 몸을 편다 싶을 때 줄자를 대 놓고 셔터를 눌렀다. 그래도 지렁이가 조금 꿈틀거렸는데 길이가 30cm가 조금 넘었다.
사진을 찍고는 제일 축축해 보이는 밭 구석에 지렁이를 모시고 가서 흙으로 잘 덮어 주었다. 1년에 지렁이 한 마리가 평균 10kg의 거름을 만들어낸다는데 너는 덩치 값을 꼭 해라 격려를 해 주었다. 사람 중에는 먹기만 하고 빈둥빈둥 노는 사람도 있지만 지렁이는 먹는 것 자체가 일이니까 덩치만 크고 빈둥거리는 지렁이란 있을 수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다만 남의 밭으로 넘어가지만 말라고 당부했다. 남의 밭에 가면 맹독성 농약에 명대로 살지 못할 테니 내 밭에서 좋은 짝 만나 자식 많이 낳고 자자손손 천수를 누리라고 축복을 해 주었다.
덧붙이는 글 | 농어민신문 5월 첫호에 실린 글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농(農)을 중심으로 연결과 회복의 삶을 꾸립니다. 생태영성의 길로 나아갑니다. '마음치유농장'을 일굽니다.
공유하기
30cm짜리 지렁이... 뱀인 줄 알고 놀랐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