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이 바보천치라 그려"

평생 때고도 남을 땔감보다 더 마음을 풍족하게 해주는 다슬기를 보며

등록 2006.06.01 16:22수정 2006.06.01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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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새벽 산책길을 나서질 못했습니다. 산을 오르면 머리가 지끈거렸기 때문입니다. 뒷짐 지고 폼 나게 걷다가 솔잎이 두툼하게 깔린 작은 오솔길에 퍼질러 앉아 숨고르기를 하곤 했는데, 그럴 마음이 전혀 생기질 않았습니다. 오솔길을 바라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혀왔습니다. 그 길은 나뿐만 아니라 노루며, 토끼, 알 수 없는 그 어떤 수많은 뭇 생명들의 길이었습니다.


"니들 금방 노루 새끼 지나가는 거 봤냐? 일루 지나갔지, 잉. 못 봤어? 못 봤으면 말구."

나는 그 오솔길을 걸으며 약간 맛이 간 인간처럼 나무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대화를 나눴던 나무들의 밑동이 잘려나갔거나 뿌리를 내놓고 나자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산 하나가 벌거벗겨지자 눈앞에 계룡산 자락이 훤히 펼쳐졌습니다. 생각해 보니 수많은 나무들을 베고 짓이기고 무자비하게 산허리를 까뭉갠 것은 바로 이 빼어난 전망 때문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전망 좋게 해놓고 비싸게 되팔려는 속셈이겠지요.

a 마당에서 한자쓰기 놀이하는 인효와 인상이.

마당에서 한자쓰기 놀이하는 인효와 인상이. ⓒ 송성영

땅 투기꾼들 때문에 한창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마당에서 한자 쓰기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큰 아이 인효가 불러 주면 작은 아이 인상이는 나무 가지로 땅 바닥에 또박또박 받아썼습니다. 불러주고 쓰고 지우고, 다시 불러주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글 장난을 하다말고 갑자기 큰 아이가 그랬습니다.

"어? 저거 소쩍새 소리지, 잘 들어 봐봐."
"……."
"맞지 아빠, 소쩍 소쩍 그러잖아."
"그러네…."


"근데 아빠, 뒷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 안돼?"
"왜?"
"뒷산에는 소쩍새도 있구, 또 부엉이도 있고 노루도 살고, 토끼도 있고…. 야생동물들이 많이 살잖어, 국립공원이 되면 땅 투기꾼들도 개발 못할 거구."
"그러면 좋겠지만 어른들은 국립공원을 아무 데나 안 만들어."

"뭐 때문에 국립공원으로 못하는겨?"
"어른들이 바보천치라 그려."



그날 나는 녀석의 국립공원 타령에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이 산 저 산에 금을 그어 놓고 여기는 보호해야 되고 저기는 함부로 까뭉개도 상관없다는 식의 어리석은 땅 놀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고사리들이 땅을 뚫고 올라올 무렵, 다시 새벽 산책길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산채를 뜯어 찬거리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쓰러진 나무들을 보지 않으려고 애써 고개를 돌렸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쓰러진 나무들이 나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공연히 먼 산을 바라보았지만 자꾸만 자꾸만 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의리도 없는 놈, 우리 때문에 매일 매일 기분이 좋아져 고맙다고 할 때는 언제고, 우리를 내팽개쳐! 나쁜 놈!'

사실 나는 나대로 땅 투기꾼들에게 고래고래 소리질러가며 싸웠습니다. 하지만 자본 앞에서는 허공에 흩어져버리는 메아리일 뿐이었습니다. 지역 산림과에 알아봤더니 불법으로 까뭉갰다 하더라도 벌금 몇 푼을 물거나 거기다가 묘목을 심으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법이 그렇다고 합니다.

땅 투기꾼들은 그 잘난 법에 따라 자신들이 까뭉갠 산에 은행나무를 대충 꽂아 놓았습니다. 은행나무를 심는 비용은 땅 투기로 벌어들이는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일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자본에 눌려 나무들이 베어지고 산들이 까뭉개지는 것이었습니다. 좀 더 많이 먹고자하는 인간들의 탐욕으로 숱한 생명들이 죽어 자빠져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땅 투기꾼들에 의해 베이고 뽑힌 나무들이 남은 생기마저 잃어가고 있을 무렵, 땔감을 구하러 산에 올라갔다가 이미 지천에 땔감들이 나뒹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평생을 때고도 남을 만한 분량이었습니다.

불과 한 두 달 전까지만 해도 가슴 아리게 다가왔던 나무들이 죄다 땔감으로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나 같은 불쌍한 중생의 속성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산책길에서 돌아오면서 적당히 마른 나무들을 몇 차례에 걸쳐 짊어지고 내려왔습니다.

미군의 폭격 속에서 울부짖던 이라크 사람들의 참혹함을 머릿속에서 지워가고 있듯이 그렇게 인사말을 주고받았던 나무들의 허망한 죽음에 대해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힘들이지 않고 얻게 된 그 시신 같은 땔감들은 그리 반갑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자연사하거나 천재로 인해 쓰러져 있는 단 한 그루의 나무에도 횡재한 듯 반갑고 고마웠는데 이제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운운하기에는 너무나 뻔뻔한 일이었습니다. 그저 불을 지피는 땔감이었습니다. 예전처럼 산을 헤매고 다니지 않아도 언제 어느 때고 구할 수 있는 땔감들, 너무나 풍족했지만 결코 기분 좋은 풍족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몇몇 동네 사람들 또한 땅 투기꾼들이 산을 까뭉갤 무렵 다소 '풍족함'을 누렸습니다. 불법으로 산을 까뭉갠 투기꾼들은 동네 사람들의 입막음을 위해 돈 봉투를 돌렸던 것입니다. 돈 봉투를 받은 사람들은 기분 좋았겠지만, 받지 않는 사람들 중에는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놈의 입만 입이냐, 나쁜 놈들 지들만 받아 쳐 먹고."

몇 년 전, 멀쩡한 마을 앞길을 넓히는 복개 공사를 할 때도 그랬습니다. 버들치들이 올망졸망 마을 앞개울에서 우리 집 옆구리를 거쳐 산 깊이 오르락내리락 했는데 거기에 토관을 묻어 길을 넓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복개공사를 하게 되면 버들치며 다슬기, 다슬기를 먹이로 살아가는 반딧불이가 눈에 띄게 사라져 갈 것은 불 보듯 뻔했지만 반대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마을복지건설'에 반대했다가는 당장 돌팔매질을 당할, 너무나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습니다.

결국 복개공사로 인해 자동차 한 대가 더 빠져나갈 수 있을 만치의 마을 앞길이 넓혀졌고, 동네 사람들 모두가 흡족해 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분 좋음은 잠시뿐이었습니다. 도로가 넓혀진 만큼 동네 인심이 넉넉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사나워졌습니다.

예전에는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길 한 켠에 조심스럽게 벼를 말리곤 했는데, 도로가 넓어지자 아예 도로 전체를 점거해 버리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서로가 먼저 벼를 내다 말리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삿대질까지 해가며 싸움을 벌였습니다. 자연을 까뭉개고 그 대가로 얻은 풍족함이 마을에 화를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땅 한 평 없는 우리는 어느 해, 갑자기 땅 투기꾼들의 성화에 못 이겨 이삿짐을 꾸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 비워줘야 할지도 모를 남의 땅에 부지런히 밭작물을 키우고 있습니다. 오늘은 밭에 물을 주기 위해 개울가로 갔다가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었습니다.

개울 속에는 다슬기 몇 마리가 나뭇잎에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다슬기의 등껍질이 햇빛에 반사돼 반들반들하니 참으로 예뻐 보였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그렇게 개울에 널려 있는 다슬기였을 뿐이었는데, 땅 투기꾼들의 극성으로 조만간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픔으로 남게 될 소중한 생명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아프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모처럼만에 마음이 참 편했습니다. 그랬습니다. 평생 때고도 남을 풍족한 땔감보다 살아 있는 다슬기 몇 마리가 훨씬 더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생태전문잡지 월간 <자연과 생태(www.econature.co.kr)> 6월호에 송고한 내용을 수정해서 올립니다.

덧붙이는 글 생태전문잡지 월간 <자연과 생태(www.econature.co.kr)> 6월호에 송고한 내용을 수정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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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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