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자히르, 아이만, 아이만의 어머니와 아버지.김남희
머물던 숙소의 주인 자히르와 함께 베이루트의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 사브라와 샤틸라를 찾은 날이었다.
이 캠프는 1982년 레바논의 친이스라엘파 대통령 바쉬르가 폭탄 테러로 사망한 후 이스라엘의 묵인 아래 기독교도 레바논 군사조직(팔랑지스트)의 보복 공격이 자행되었던 곳이다.
테러리스트 수색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된 이틀간의 만행에서 그들은 2천명(대부분 여성과 아이들)을 살해하고 강간했다. 국제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그 사건은 결국 유엔의 평화유지군을 다시 레바논으로 불러들여 소득없는 주둔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캠프로 들어서자 아이들이 "사우리나! 사우리나!(사진)"를 외쳐대며 카메라 앞으로 몰려들었다. 거리의 어른들은 황톳물이 쏟아져 나오는 수도관을 가리키며 그 물을 먹고 살아야 하는 열악한 환경을 호소했다. 역사를 통해 충분히 겪었을 텐데도 여전히 외국인이 그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믿는 걸까?
골목은 좁고 지저분했으며, 전선줄이 마구 엉킨 건물들은 한 눈에 보기에도 위험해 보였다. 82년의 공격으로 부서진 건물들이 여기 저기 남아 있어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거리에는 이스라엘에 의해 살해된 팔레스타인 정치·종교 지도자들의 사진과 포스터, 선동적인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곳에서 전쟁은 아직 현재진행형이었다.
자히르의 친구인 아이만 집에서 차를 마실 때 아이만의 아버지(64)가 자리를 같이 했다. 1948년,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대한 면죄부로 서구 세계가 이스라엘의 수립을 눈 감아 주던 그 해, 그는 여섯 살이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쫓겨나 모든 것을 잃고 고향을 떠날 때만 해도 그의 가족들은 곧 돌아가게 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5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아직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레바논 내의 캠프를 전전하며 살아오는 동안 그는 같은 처지의 팔레스타인 여성과 결혼해 2남 6녀를 두고 손자까지 스물두명의 가족을 이루었다. 무슨 일을 하며 살아왔냐는 내 질문에 그는 "닥치는 대로, 주어지는 대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말하며 웃었다. 주름진 눈가의 웃음 속으로 눈물이 번지는 것 같았다. 나는 평생을 조국 없이, 집도 없이 떠돌며 살아온 한 남자의 절망과 분노를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올해 스물네살인 아이만은 거리에서 배웠다는 영어가 썩 훌륭했다. 그는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직업도 없이 난민으로 살아야 하는 청춘의 무력감을 토로했다.
그들의 재산은 분노와 한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