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만 해도... 지난 2004년 2월. KTX 운행을 하루 앞두고 예비 여승무원들이 동대구역으로 향하는 9999호 열차에 시험 탑승한 승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황광모
믿고 싶었지만, 더 이상 이건 아니었다
1주일에 하루 있는 휴무가 어느새 10일에 하루, 보름에 하루로 바뀌어 갔다. 그렇게 제대로 쉬지 못하고 밤낮없이 열차를 타면서 승무원들의 몸 상태는 나날이 나빠졌다. 동료 대부분이 병과 싸워야만 했다.
나빠지는 몸 상태와 달리 열차내 업무는 하루하루 가중되었다. PDA 하나 덜렁 주고서는 바로 다음날부터 PDA를 들고 검표를 하게 한 후 수익금을 내라며 압박을 했다. 계산법을 배우지 않아 착오가 있으면 차액을 승무원 개인에게 변상하도록 했다.
어느 날엔 비닐장갑 하나 없이 맨손으로 화장실 청소를 하라는 상부 지시가 내려왔다. 부정 승차객을 상대로 벌어오는 차내 수익금이 적은 날에는 일을 못하는 승무원으로 눈총을 받아야 했다.
서울-광명처럼 중간 정차역의 시간 간격이 15분 정도로 짧을 때에는 15분 만에 140명의 특실고객에게 음료 서비스를 하고 필요한 고객에게 담요를 제공하고 수거하고 승객도 깨워야 하는 슈퍼승무원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업무가 힘들다고, 월급이 적다고 불평한 적은 없었다. 갈수록 줄어드는 월급과 늘어나는 업무량에 불만과 피로는 쌓여갔지만 우리가 원한 것은 돈보다는 제대로 된 상부의 업무관리와 교육 아래 일하는 것이었다.
첫날 느낀 어렴풋한 불안감은 2005년 2월 모든 KTX 승무원에게 분명한 현실로 나타났다. 새로 입사한 후배 승무원들의 교육기간이 보름에서 일주일로 바뀌더니 퇴사한 승무원에게 반납받은 헌 유니폼이 신입 승무원에게 지급되었다.
이런 온갖 부당함을 지적하는 승무원에게는 다음해 재계약을 빌미로 협박과 폭언이 쏟아졌다. 아파서 응급실로 실려간 승무원에게는 내일 당장 차탈 사람이 없으니 쓰러져도 열차에서 쓰러지라며 일하러 나오라고 했다. 더이상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쓰러지더라도 열차에서 쓰러져라"
2006년 2월은 정말 숨가쁘게 돌아갔다. 모든 KTX 여승무원의 조합원 총투표를 통해 90%가 넘는 압도적 가결로 총파업을 결의했다. 현장에서는 3월 1일 철도총파업에 대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2월 28일 전국철도노조 총파업 거점지로 이동할 때 하늘에선 무심하게 비가 내렸다. 그 때까지만 해도 두려움보다는 일주일만 버티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얕은 기대감에 젖어있었던 것 같다. 저녁 9시부터 진행된 전야제는 밤이 깊을수록 절정으로 치달았고, 눈치 없이 내리는 차가운 겨울비에 얼어가는 몸과는 상관없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자리에 한마음으로 모였으니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마음은 뜨거워져 갔다.
하지만 그 뒤의 시간은 차가운 시멘트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온 몸이 꽁꽁 얼어붙고, 제대로 씻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지 스스로 깨달아가는 1분 1초였다.
3월 1일 철도노조의 총파업은 처음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가 함께 하는 투쟁이었고, KTX 여승무원 문제를 포함한 모든 요구안의 일괄타결을 놓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했기에 뜻깊은 싸움이었다.
하지만 3월 4일 철도노조는 직권중재와 공권력 투입이라는 횡포에 현장으로 복귀하기로 결정했고 KTX승무원들은 총회를 거쳐 독자적인 파업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날 밤, 서울 KTX 승무원들과 부산 KTX 승무원들이 힘있는 파업투쟁을 위해 양평에 모였다.
파업... 그리고 상상도 못하던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