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이면 살아 돌아오는 '아들'

해마다 어머니는 아들의 친구들을 기다리신다

등록 2006.06.05 13:49수정 2006.06.05 18:07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현충일을 이틀 앞둔 휴일인 4일 오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은 한 어린이가 무명용사 묘비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현충일을 이틀 앞둔 휴일인 4일 오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은 한 어린이가 무명용사 묘비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저에겐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주소를 둔 친구가 둘이나 있습니다. 그들은 여름 더위와 겨울 추위를 맨몸으로 겪으면서도 이사 갈 줄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고독한 일상이 친구입니다. 하지만 현충일이 되면 옛 친구 몇이 계절처럼 그들을 찾습니다. 두 사람은 학군장교로 1970년에 소위로 함께 임관했던 대학 친구이며, 전우입니다.


'동작동 국립묘지 29묘역 묘비번호 3240번'은 이희령 대령의 주소입니다. 현충원에선 군인 남편과 부인 이름이 나란한 묘비를 간간이 볼 수 있답니다. 그래도 이 대령네 비석은 좀 별난 데가 있습니다. 아내는 배위의 위치에 있고, 그들의 아들, 딸의 이름도 돌판에 새겨져 엄마 아빠 앞에 함께 있으니까요.

1983년. 화학 장교였던 그는 미국 군사학교에서 몇 년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중요한 교육 과정을 마친 참이었습니다. 9월1일, 함께 미국 생활을 했던 가족 모두 KAL기 추락으로 죽음을 맞이했고 일본 북해에서 외로운 넋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며 기뻐하던 가족들 표정이 선한 데다가 귀국한다며 들떠 전화를 걸던 이 대령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돕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녔던 아이들 귀현이와 성준이 남매. 여름이면 우리집 아이들과 함께 개울가에서 놀면서 부르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바로 '아빠와 나'입니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선화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해마다 나는 '군부대의 전속이 잦아 아이들을 자주 못 보니 아이들과 작은 꽃밭이라도 같이 만들고 싶은 마음에 딸아이를 목에 태우고, 아들이랑 손잡고 함께 노래하던 좋은 세월 속의 친구여. 이제 자네 가족 모두 모여 작은 꽃밭을 만들어 채송화와 봉선화를 보고 있는가'라고 마음 속으로 친구에게 말합니다.


그 가족들이 바다 속 어딘가에 물이 되고 모래가 되었습니다. 뼈 하나 살 한 점 남기지 않아 현충원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어 애통 절통하신 어머니의 가슴에만 한동안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다쳐도 깜박 넘어 갈 판에 아들 잃고 며느리 잃고 손자 둘 잃은 어머니의 모습은 저승과 이승 사이에 계신 듯하였습니다.

묘지에는 육신의 한 자락이 있어야 묻히는 곳이지 영혼을 모시는 곳은 아니었기에 어머니는 사방 천지를 보고 목 놓아 우셨습니다. 한참 뒤에 도착한 이 대령 가족 이삿짐 속, 옷가지에 묻은 몇 가닥 머리카락이 와서야 비로소 죽은 자의 대접을 받아 영혼과 함께 묻혔습니다. 어머니는 그제야 묘지를 지키며 우셨습니다.


현충일이 돌아올 때마다 어머니는 아들을 기다리듯 아들의 친구들을 기다렸습니다. 많은 아들들이 묘지가 등대인 양, 자신들은 바다인 양 나타났습니다. 한 해가 지나고 두 해를 넘겼나요. 어머니 역시 봄날의 꽃 지듯 가셨습니다. 자식을 보낸 홀어머니는 더 이상 견딜 힘이 없었습니다. 다시 세월 따라 현충일마다 묘지에서 형 친구들을 맞이하던 남동생은 암으로 떨어지는 꽃잎처럼 갔습니다.

가족이 떠나니 묘지 앞이 비었습니다. 세월 따라 친구들 걸음도 썰물처럼 빠져 나갔어도 저마다 마음만은 간절하겠지요. 단지 몇 명만 해마다 묘비 앞에 섭니다. 함께 모인 친구들은 오지 않은 친구들에 대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인들 내년에 또 온다는 보장을 어찌하리까.

묘지를 떠날 때 쏟아지는 양광에 눈시울이 젖습니다. 어디 친구만 묻혔습니까. 친구와 함께 하였던 청춘이 묻혀 있고, 친구의 당당했던 기상이 안타깝기에 그러합니다. 이제 쓸쓸한 묘지의 모습 또한 그렇습니다.

"어머니 반짝 웃으시려 현충일 1년을 기다리셨지요"

a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29묘역 묘비번호 3240번. 이희령 대령의 주소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29묘역 묘비번호 3240번. 이희령 대령의 주소다. ⓒ 권우성

동작동 국립묘지의 끝자락 55구역 묘비번호2731에는 강종구 대위가 삽니다. 강 대위는 1977년 6월 22일에 순직하였고 부모님께서는 아직 살아 계십니다. 강 대위는 총각으로 세상에 남긴 혈육 하나 없습니다. 해마다 강 대위 어머니께서는 아들을 기다리시듯 아들의 친구들을 기다리십니다.

현충일에 묘지 찾기를 20여 년 하다 보니 그 세월 따라 정정하셨던 두 분의 모습이 점점 힘들어 보이십니다.

"아이고 또 와주었네. 고마워라~"

작년 강 대위 어머님의 건강이 안 좋아보였습니다. 강 대위의 아우는 "두 분이 교대로 병원 출입을 하셔서 매일 매일이 조바심이 나요"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에겐 6월의 햇살이 너무 힘들어 보였습니다. 강 대위 누이와 아우는 현충일에는 꼬박 꼬박 나와서 형의 친구들을 맞이합니다.

강 대위 어머니께서는 먹을 것을 챙겨주시며 우리가 달게 먹으면 자식이 먹는 듯 반가워하십니다. 부모님께서 묘지를 지켜주시는 날들이 영원할 리 없습니다. 해마다 강 대위 묘지를 찾아갈 때마다 약해지신 부모님을 뵈면 늘 조심스럽고 허망합니다. 세월이 가면 가는 대로 자식 생각에 더 힘든 부모님들이 계신 곳을 이번에도 찾으려고 합니다.

전우 대신 남은 아들들이 할 일은 그냥 부모님 앞에 서는 일입니다. 자식 보듯 해드리는 것입니다. 당신들의 자식들도 이젠 환갑을 넘겨 백발이 성성할 테니까요. 그러면 어머니는 말씀 하실 것입니다. "에고. 흰머리 늘고 마음고생, 세상 고생 많은 가봐"하시면서 당신 자식 생각에 목 메여 하실 겁니다.

'어머니!'하고 잡아보던 어머니 손힘이 올해는 어떨는지요. 우리 친구 중 하나는 강 대위 누이와 젊은 날 좋아했던 적이 있어서 해마다 만나면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한바탕 웃습니다. 이번에도 그 이야기가 꼬리 물고 이어지면, 잠깐 웃음에 슬픔은 한 순간 잊혀질 것입니다.

어머니는 반짝 웃음을 웃으시려 현충일 1년을 기다리셨지요. 어머니 마음을 우리 아들들은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 기다리세요. 아들들이 갑니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생산성본부 iso 심사원으로 오마이뉴스 창간 시 부터 글을 써왔다. 모아진 글로 "어머니,제가 당신을 죽였습니다."라는 수필집을 냈고, 혼불 최명희 찾기로 시간 여행을 떠난 글을 썼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2. 2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3. 3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4. 4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5. 5 '바지락·굴' 하면 여기였는데... "엄청 많았어유, 천지였쥬" '바지락·굴' 하면 여기였는데... "엄청 많았어유, 천지였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