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오마이뉴스 남소연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입을 열었다.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의 속내에 청진기를 댔으니 한 마디 한 마디 새겨들어서 나쁠 게 없다.
김병준 전 실장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선거 참패를 예상했다고 말했다. 이 말은 그리 새로울 게 없다. 선거기간 내내 판세를 분석하는 여론조사 결과는 수없이 보도됐다. 열린우리당의 참패는 기정사실이었다. 단지 2:8로 질 것인지, 1:9로 질 것인지가 관심사였을 뿐이다.
새겨들어야 할 대목은 그 다음이다. "이보다 더한 시나리오가 있을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은 당의 요구를 다 들어줬다"고 했다. 이해찬 총리 경질과 한명숙 총리 임명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방점을 찍어야 할 말은 "그래서"라는 접속사다. "그래서"라는 접속사에는 '순리 대로 풀었다'는 뜻이 담겨있다.
세세히 짚자.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도 왜 당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순리라고 생각했을까? 어차피 질 선거라면 차라리 국정이라도 제대로 챙겨야 하지 않았을까? 김병준 전 실장의 '고백'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은 김병준 전 실장에게 두어 번 총리 후보 언질까지 줬다. 어차피 질 선거라면 코드가 맞는 참모를 총리로 앉혀 국정이라도 단단히 쥐는 게 낫지 않았을까?
노 대통령은 왜 여당의 요구를 '다' 들어줬을까?
한 가지 사실이 확인된다. 어차피 질 선거라고 보면서도 열린우리당에 성의를 다 한 노무현 대통령, 그의 흉중에 '책잡히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있었다고 보는 게 상식이다. 선거 책임론을 피해가려는 의도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3일 정동영 전 의장 등을 만나 "선거 참패 후 대통령이 당을 떠나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다"고 한 말도 같은 맥락에 놓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맥이 잡혔으니 말 하나를 더 보태자. 김병준 전 실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기간 중 또 한 번 극적 드라마를 연출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중앙일보> 기자의 질문에 "아니다"라고 했다. "대통령의 드라마는 버림으로써 만드는 드라마다. 그러나 이젠 버릴 게 없다. 던지고 버리는 정치를 해왔는데 지금은 그게 없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극적인 탈당'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탈당을 분당으로 연결해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뜻 말이다.
이런 흉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하나 더 있다. 김병준 전 실장은 고건 전 총리의 정치행보를 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가만히 있다가 민주당, 열린우리당 이탈 세력들로 당을 만든다고 하면 잘 안 될 것이다."
일단 뽑아내자. 김병준 전 실장은 고건 전 총리의 연대세력으로 '열린우리당 이탈세력'을 꼽았다. 여기에 덧붙일 말이 있다. "호남표를 생각해 민주당과 통합하고, 영남을 고립화하는 구도로 나가면 얼마든지 쉽게 정치할 수 있다. 그러나 쉬운 길이 있지만 어렵게 가겠다는 것이 대통령의 생각"이라는 말이다.
무슨 뜻인가? 김병준 전 실장은 ▲박근혜 대표 피습사건 와중에도 경북지사에 출마한 열린우리당 박명재 후보가 23%를 얻은 사실을 '희망'이라고 평했고 ▲열린우리당이 내부에서 동력을 찾으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이 '걱정'이라며 ▲'멀리 보고 원칙과 방향을 세워나가면 길이 보인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재삼 강조했다.
종합하면 이렇다. 노무현 대통령은 탈당할 생각이 없다. 호남표를 의식해 민주당과 통합할 생각도 없다. 굳이 고건 전 총리를 매개로 호남표를 복원하고자 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이 열린우리당을 이탈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반지역주의' 원칙과 방향을 세워나가며 내부 동력을 찾을 것이다.
의문이 싹튼다. 노무현 대통령은 뭘 믿고 저렇게 생각하는 걸까? 정말 대선에서 이길 수 있다고 보는 걸까? 김병준 전 실장은 이렇게 답했다.
"대통령 뽑는 기준이 누가 잘 하느냐보다 누가 흠집이 덜 나느냐에 달렸다… 선거 몇 달 남겨두고 막판에 뜨는 후보가 대통령 될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