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질 선거였는데... 노무현의 속내는?

5·31 이후 입 연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

등록 2006.06.07 09:16수정 2006.06.07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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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오마이뉴스 남소연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입을 열었다.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의 속내에 청진기를 댔으니 한 마디 한 마디 새겨들어서 나쁠 게 없다.

김병준 전 실장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선거 참패를 예상했다고 말했다. 이 말은 그리 새로울 게 없다. 선거기간 내내 판세를 분석하는 여론조사 결과는 수없이 보도됐다. 열린우리당의 참패는 기정사실이었다. 단지 2:8로 질 것인지, 1:9로 질 것인지가 관심사였을 뿐이다.

새겨들어야 할 대목은 그 다음이다. "이보다 더한 시나리오가 있을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은 당의 요구를 다 들어줬다"고 했다. 이해찬 총리 경질과 한명숙 총리 임명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방점을 찍어야 할 말은 "그래서"라는 접속사다. "그래서"라는 접속사에는 '순리 대로 풀었다'는 뜻이 담겨있다.

세세히 짚자.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도 왜 당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순리라고 생각했을까? 어차피 질 선거라면 차라리 국정이라도 제대로 챙겨야 하지 않았을까? 김병준 전 실장의 '고백'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은 김병준 전 실장에게 두어 번 총리 후보 언질까지 줬다. 어차피 질 선거라면 코드가 맞는 참모를 총리로 앉혀 국정이라도 단단히 쥐는 게 낫지 않았을까?

노 대통령은 왜 여당의 요구를 '다' 들어줬을까?

한 가지 사실이 확인된다. 어차피 질 선거라고 보면서도 열린우리당에 성의를 다 한 노무현 대통령, 그의 흉중에 '책잡히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있었다고 보는 게 상식이다. 선거 책임론을 피해가려는 의도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3일 정동영 전 의장 등을 만나 "선거 참패 후 대통령이 당을 떠나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다"고 한 말도 같은 맥락에 놓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맥이 잡혔으니 말 하나를 더 보태자. 김병준 전 실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기간 중 또 한 번 극적 드라마를 연출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중앙일보> 기자의 질문에 "아니다"라고 했다. "대통령의 드라마는 버림으로써 만드는 드라마다. 그러나 이젠 버릴 게 없다. 던지고 버리는 정치를 해왔는데 지금은 그게 없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극적인 탈당'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탈당을 분당으로 연결해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뜻 말이다.


이런 흉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하나 더 있다. 김병준 전 실장은 고건 전 총리의 정치행보를 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가만히 있다가 민주당, 열린우리당 이탈 세력들로 당을 만든다고 하면 잘 안 될 것이다."

일단 뽑아내자. 김병준 전 실장은 고건 전 총리의 연대세력으로 '열린우리당 이탈세력'을 꼽았다. 여기에 덧붙일 말이 있다. "호남표를 생각해 민주당과 통합하고, 영남을 고립화하는 구도로 나가면 얼마든지 쉽게 정치할 수 있다. 그러나 쉬운 길이 있지만 어렵게 가겠다는 것이 대통령의 생각"이라는 말이다.

무슨 뜻인가? 김병준 전 실장은 ▲박근혜 대표 피습사건 와중에도 경북지사에 출마한 열린우리당 박명재 후보가 23%를 얻은 사실을 '희망'이라고 평했고 ▲열린우리당이 내부에서 동력을 찾으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이 '걱정'이라며 ▲'멀리 보고 원칙과 방향을 세워나가면 길이 보인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재삼 강조했다.

종합하면 이렇다. 노무현 대통령은 탈당할 생각이 없다. 호남표를 의식해 민주당과 통합할 생각도 없다. 굳이 고건 전 총리를 매개로 호남표를 복원하고자 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이 열린우리당을 이탈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반지역주의' 원칙과 방향을 세워나가며 내부 동력을 찾을 것이다.

의문이 싹튼다. 노무현 대통령은 뭘 믿고 저렇게 생각하는 걸까? 정말 대선에서 이길 수 있다고 보는 걸까? 김병준 전 실장은 이렇게 답했다.

"대통령 뽑는 기준이 누가 잘 하느냐보다 누가 흠집이 덜 나느냐에 달렸다… 선거 몇 달 남겨두고 막판에 뜨는 후보가 대통령 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 2일 정책홍보토론회에서 "선거보다 제도가 나라미래 결정"이라고 발언한 노 대통령.
지난 2일 정책홍보토론회에서 "선거보다 제도가 나라미래 결정"이라고 발언한 노 대통령.연합뉴스 박창기
새로운 사람, 흠집 적은 사람을 대선 후보로 올릴 시간은 충분히 남아있다고 본다면 급할 게 없다. 더구나 노무현 대통령은 "선거 한두 번으로 나라가 잘 되고 못 되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시간을 충분히 갖고 새로운 사람을 발굴할 것이되, 설령 그 시도가 실패로 끝난다 해도 '원칙과 방향'을 유지한 패배라면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는 '희망'은 움켜쥐는 것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함직하다.

어떻게 봐야 할까? 우선 확인되는 건 일관성이다. 김병준 전 실장의 말에 노무현 대통령의 몇 가지 언급을 보태 얼개를 짜보니 '원칙과 방향'이 뭔지 대충 잡힌다. '반지역주의'를 토대로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겠다는 일관된 생각이다.

문제는 이 일관성이 일방성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는 교호작용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과 정치현실은 별개일 수 있다. '반지역주의' 정당으로 열린우리당을 정비하려는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 그것을 위해 대선 패배도 감수할 수 있다는 의지는 '정권 재창출론'의 저항과 반발을 돌파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반된 민심, 어떻게 돌릴 것인가

가능할 것인가? 누구도 단정할 수 없는 물음이다. 지금 이 시점에 단정하는 건 속단 또는 예단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가변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

노무현 대통령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국민 여론을 돌려야 한다. 하지만 요지부동이다. <한국일보>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열린우리당의 지방선거 참패 이유로 44%의 국민이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운영 잘못"을 꼽았다. "열린우리당의 내부갈등과 무능력"을 꼽은 국민도 38.9%에 달했다.

열린우리당의 무능을 꼽은 여론이야 당 정비 여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치더라도, 참여정부의 개혁정책에 대해 10점 만점에 3.44점을 매긴 국민 평가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호남표 복원을 주장하는 세력이 이탈해 고건 전 총리 곁으로 갈 경우 열린우리당은 더더욱 '노무현 당'이란 이미지가 강화될텐데….

열린우리당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열린우리당 의원 상당수가 "당 요구를 순순히 들어준" 노무현 대통령의 책임을 거론한 바 있다. 심지어 친노 직계로 분류되는 김두관 전 최고위원까지 그렇게 말했다.

이런 당 사정은 '당 이탈' 양상을 뒤바꿔 놓을 수도 있다. 초기에는 김병준 전 실장 말대로 고건 전 총리에 기대려는 일부 세력, 즉 공공연히 고건 전 총리와의 연대를 거론한 안영근 의원, 더 나아가 그가 속한 '안개모' 등이 이탈세력이 될 수 있지만 거기서 그칠 것 같지는 않다.

열린우리당 안에서 호남표 복원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확장되면 될수록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호남표 복원에 반대하는 세력의 '당 이탈'을 압박하는 양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결국 숫자 싸움으로 귀착된다. 당 정비의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 판도는 달라진다. 열린우리당이 비상대책위 구성을 놓고 혼선과 진통을 거듭하는 배경을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김근태 이념론에 깔린 계산은...

김근태 열린우리당 최고위원.
김근태 열린우리당 최고위원.오마이뉴스 이종호
'김근태 비토론'이 '전임지도부 공동책임론'에서 '김근태 이념'으로 옷을 갈아입으며 계속 되는 흐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열린우리당에선 비대위의 권한과 임기를 놓고 갑론을박이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7월 말 국회의원 재보선까지로 임기를 한정할 것인지, 아니면 내년 2월까지 당 정비를 책임지고 추진하게 할 것인지를 놓고 이견과 갈등이 거푸 나오고 있다. 이 와중에서 '비대위원장 김근태'의 이념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같은 당 사람의 이념까지 문제 삼는 데에는 '같이 못 한다'는 뜻이 깔려있다. 여차하면 '깨겠다'는 경고다.

눈여겨 보자. '비대위원장 김근태'의 이념까지 문제 삼으며 울타리 치기에 나선 세력이 누구인가? 이들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견지하는가? 이들의 규모와 행동 여하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좌표도 규정받을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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