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먼저 아이들에게 사과의 본을 보여라"

그 아이의 눈빛이 깊어 보인 이유

등록 2006.06.09 10:32수정 2006.06.09 10:33
0
원고료로 응원
아이들을 가볍게 만날 것인가, 무겁게(혹은 진지하게) 만날 것인가. 가끔 이런 고민에 빠질 때가 있다. 나는 매사에 진지한 편이지만 그런 진지함이 아이들과의 소통을 방해할 수도 있기에 내 본디 마음을 숨기고 아이들을 가볍게 만나는 방식을 선택할 때가 많다.

교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숨을 죽이고 샛별 같은 눈을 반짝이며 맛있게 받아먹던 시대는 이미 과거의 시간대로 사라진 지 오래이니 어쩌면 그것은 나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타협이라고 말해야 옳을 수도 있겠다.

요즘 나는 아이들을 가볍게 만나는 일에 제법 능숙해져가고 있다. 수업 시간에 아무리 주의를 주어도 일분이 채 못 되어 다시 그 행동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을 내줄 때도 있지만 대개는 가볍게 기술적으로 처리하는 편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영희, 책 들고 이리 나와라. 어제도 선생님 옆에서 공부하니까 아주 잘하던데 오늘도 그러고 싶은 모양이지?”

그렇게 말하고는 그 아이를 교탁 위에 앉히고 나도 그 아이 곁에 나란히 앉아 수업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5분쯤 수업을 하다가 빙그레 웃으며 아이를 돌려보내면 아무리 산만한 아이라도 곧바로 과거의 습관으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가능한 아이들과 감정싸움을 하지 않고 하루를 넘기는 것이 오늘날 교사에게 부여된 가장 힘겹고 서글픈 책무이기도 하다.

한 아이의 눈물을 뺄 정도로 혼을 내주려면 나도 그만큼의 눈물(혹은 에너지)을 쏟아야 하는데 그 결과가 썩 좋지 않을 때가 많다. 교무실에 불려와 교사에게 단단히 혼쭐이 나고 돌아가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아도 변화의 조짐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하긴 교사의 따끔한 충고 한 마디에 자신의 행동을 고칠 아이라면 교무실까지 불려오는 일도 없을 테니 그럴 법도 한 일이다.

나는 어제(8일) 점심을 먹지 않았다. 일부러 점심 한 끼를 굶은 것이다. 오늘도 그럴 생각이다. 왜 그런 결심을 한 것일까? 그것은 아이들을 무겁게 만나기로 작정한 까닭이다. 물론 늘 무겁게 만나겠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예전처럼 아이들을 가볍게 만나기 위해서 그런 조치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막상 그 과정을 설명하려니 갑자기 막막해진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할까? 우선, 어제 한 아이를 불러 전해준 편지를 먼저 공개할까 한다.

사랑하는 ○○에게, 그리고 3반 딸들에게


어제 7교시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너희들에게 친절한 교사가 되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서 할 말이 없구나.

물론 그런 일이 생기게 된 것은 나만의 잘못은 아니다.
너희들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 책임을 져야할 부분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나의 잘못을 먼저 생각하고 싶다.

너희들에게 친절한 교사가 되겠다고 약속했던 것은
너희들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시간을 가지고 기다리면서
다정한 말과 행동으로 다가가겠다는 약속이었기에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일에 대해서 사과하고 싶다.

어제 내가 저질렀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반성하는 의미에서
그리고 다시는 그런 행동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오늘과 내일 점심을 굶어볼 생각이다.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는 우리 말 속담이 있다.
이번 일로 우리의 만남이 더욱 깊어지고
서로를 배려하고 교실의 평화를 지키려는 갈망이
더욱 커졌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다시 한 번 사랑하는 ○○에게, 그리고 언제나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우리 3반 딸들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

2006년 6월 8일

언제나 너희들의 친구가 되고 싶은, 부족한 영어 선생님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그제 7교시 수업 시간에 한 아이가 커다란 거울을 꺼내들고 얼굴에 크림 같은 것을 바르고 있었다. 그날만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좋은 말로 타일렀지만 행동이 고쳐지지 않았다. 아이는 아이대로 고민이 있는 듯했다. 얼굴에 자꾸만 무엇이 난다는 것이었다. 화장품을 바르면 그것이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낫지 않을 것이라고 말을 해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는 아이를 앞으로 불러내어 무릎을 꿇게 하고 반성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불과 5분이 채 못 되어 아이는 앞에 나와서도 거울을 보고 얼굴에 크림을 바르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게 반항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손에 남아 있는 크림을 얼굴에 마저 바르다가 나에게 걸린 것이었다.

나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조금은 기막힌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얼굴에만 관심이 가 있는 아이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해서 교탁 위에 놓인 잣대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아이의 종아리를 한 대 휘갈겼다.

아이는 깜짝 놀라긴 했지만 자신의 잘못을 아는 지 별 말이 없었다. 나도 그만 마음이 누그러져 아이를 자리로 돌려보냈다. 잣대로 가볍게 한 대 때린 것이었지만 생각해보니 몇 해만에 처음으로 매를 댄 셈이었다. 아이를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게 한 것도 잦은 일은 아니었다. 수업이 끝날 무렵 아이들에게 공책 정리를 하게하고 나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 이렇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무릎을 꿇게 해서 미안하구나. 앞으로 잘하자.”

그리고는 아이의 어깨를 아주 가볍게 두드려 주고 막 돌아서는 참이었다. 아이의 입에서 이런 놀라운 말이 튀어 나왔다.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

그 순간 눈앞이 캄캄했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이성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 말을 한 아이의 심리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도 나의 달라진 태도를 보자 얼른 사태를 수습하려는 표정이 역력했다.

“제 몸에 손대는 것을 정말 싫어해서 그래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선생님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그것도 잘못을 한 너를 오히려 달래주기 위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있는 선생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 말이야? 몸에 손을 대다니? 내가 선생님이지 남자야?”

오해가 있을까봐 굳이 말하자면, 나는 요즘 여학생들과 가급적이면 신체접촉을 하지 않고 있다. 나를 유난히 따르는(물론 나도 무지 예뻐하지만) 한 아이가 나를 보자마자 멀리서부터 쏜살같이 달려오면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되 일단 방어자세부터 취하는 버릇이 생길 정도다. 순수한 제자사랑의 몸짓도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 아이의 가벼움에 화가 치밀었는지도 모르겠다. 나 혼자만의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지난 3개월 동안 우리가 교실 안에서 쌓은 신뢰와 우정이 결코 만만하게 볼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아이의 책과 공책을 들었다가 그 아이의 책상에 다시 내팽개친 것은 그런 섭섭함과 허망함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내 입에서 전보다는 조금은 더 심한 말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어쩌면 아이들이 듣기에 그다지 심한 말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교실을 나올 때 내 마음이 조금은 후련했던 것을 보면 모처럼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사랑하는 그 아이에게, 그리고 내가 사랑하고, 또한 나를 사랑하는 귀염둥이 3반 아이들 모두에게 사과의 편지를 쓰려고 마음을 먹게 된 것은 한 순간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거칠게 표출해버린 나의 가벼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끔은 아이들을 무겁게 만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한 까닭이었다.

문제는 그 방법이었다. 그 아이를 데려다가 무섭도록 잘못을 일깨워주고 사과를 받아낼까? 아니면, 전체 아이들 앞에서 내가 왜 화를 낸 것인지 해명도 할겸 일장연설을 할까? 하지만 아침 기도시간에 나를 찾아주신 그분의 응답은 달랐다.

"네가 먼저 아이들에게 사과의 본을 보여라."

갑자기 혼란스러웠던 것들이 말끔히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맞아. 내가 먼저 사과하자. 사과의 본을 보여주자.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그런 진지하고 묵직한 경험을 하지 못한 아이들의 영혼이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렇게 보아서 그랬는지, 청소시간에 스치듯이 잠깐 만난 그 아이의 눈빛은 하루 사이에도 퍽 깊어 보였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AD

AD

AD

인기기사

  1. 1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2. 2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3. 3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갚게 하자"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갚게 하자"
  4. 4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5. 5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