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힘드시면 제가 업어드릴게요!"

토요휴무일, 사랑하는 제자들과 조계산에 가다

등록 2006.06.11 16:19수정 2006.06.12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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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피나물-매미꽃이라고도 합니다. 6월 무렵 조계산에 가면 무더기로 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피나물-매미꽃이라고도 합니다. 6월 무렵 조계산에 가면 무더기로 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안준철

아이들은 승규(가명)를 형이라고 부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한 해를 쉬었다가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기 때문입니다. 준수한 용모 때문인지 겨우 1년 차이인데도 승규는 점잖은 구석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좀더 시간을 두고 보니 장난기도 많고, 교실이 한참 조용하다가 누군가 떠든다 싶어서 돌아보면 녀석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에게 종종 꾸지람을 먹기도 했지요.

그렇지만 승규에게는 교사의 따끔한 충고를 순순히 받아들일 줄 아는 훌륭한 면이 있습니다. 제가 꾸지람을 주면 여느 아이들과는 달리 정색을 하며 자신의 행동을 고치려고 노력하곤 했습니다. 그 모습이 사뭇 진지해서 제 마음속에 녀석에 대한 고마움과 신뢰감이 싹트곤 했지요. 지난 주, 저는 승규에게 다가가 이렇게 넌지시 말을 건넸습니다.

“승규야, 다음 주 토요일에 선생님하고 조계산에 가지 않을래?”
“조계산요? 왜요?”

“토요 휴무일을 이용해서 선생님이랑 제자랑 일대일로 등산을 하는 그런 행사가 있어. 나는 너랑 함께 가고 싶거든. 그날 다른 약속은 없니?”
“약속은 없는데요. 근데 왜 저랑 같이 가고 싶으신 건대요?”

“응. 그건 가장 관심이 가는 제자랑 등산을 하기로 되어 있거든. 뭔가 계기가 마련이 되면 무지하게 달라질 아이인데 아직은 마음을 못 잡았고 좀 방황한다고나 할까? 요즘 너 좀 그러잖아.”
“예, 맞아요. 선생님 말씀 듣고 잘하려고 해도 잘 안 돼요. 죄송해요.”

“아니야. 너 요즘 잘 하고 있어. 잘하니까 너랑 가고 싶은 거지. 그리고 모처럼 푸른 자연 속에서 땀도 좀 흘려보고 학교에서 나누지 못한 진한 인생 이야기도 나누어보자는 거야. 네 진로에 대해서도 얘기해보고. 어때, 갈 거야?”
“갈게요. 꼭 갈게요.”

a 나무

나무 ⓒ 안준철

‘사제동행 조계산 등반’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순천사립지회(지회장 이시근ㆍ54세)가 기획한 일종의 문화행사입니다. 요즘 들어 부쩍 교사와 학생 사이가 삭막해져 가고 있지요. 교사는 교사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서로에 대한 불신과 원망의 감정들이 깊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이 누구의 잘못이라고 일방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만약 학교(혹은 교사)가 학생들의 인격을 성장시켜 주는 일에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지는 않았겠지요.


아무튼 저는 이번 행사의 파트너로 승규를 마음에 두고 일종의 ‘프러포즈’를 한 셈인데 녀석이 기꺼운 마음으로 흔쾌히 승낙해주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더욱 기쁘고 고마운 것은 저와 함께 산을 오르기도 전에 승규의 수업태도가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제가 자신을 선택해준 고마움에 대한 표현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요. 승규는 그런 아이입니다.

드디어 승규와 조계산을 등반할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오자 저는 점심시간에 승규를 다시 찾아갔습니다. 다음 날 시내버스를 탈 장소와 시간을 알려 주러 갔다가 우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갔습니다.


“지난 번 체육대회 때 무리를 해서 그런지 무릎 관절이 조금 안 좋다. 그래도 꼭 갈 테니까 너도 약속 꼭 지켜야 돼.”
“선생님, 걱정 마세요. 그리고 선생님 산 타다가 힘드시면 제가 업어 드릴게요.”

아이들이 이렇습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져주면 교사를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아이들이 버릇이 없다는 말도 조금은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교사의 인격적인 지도를 낯설어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이 덜 인격적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6월 10일 오전 8시 40분. 우리는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그곳에는 승규 말고도 네 명의 아이가 더 와 있었습니다. 제가 부담임으로 있는 반 아이들에게 사제동행 등반행사를 소개하자 선뜻 따라 나선 것입니다. 네 명의 아이들 모두 초등학교 시절부터 부모님을 따라 자주 산에 갔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는 부모님과 함께 지리산 종주를 한 경험이 있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a 조계산 장군봉(844m)에서 강이구(왼쪽에서 4번째) 선생님과 함께.

조계산 장군봉(844m)에서 강이구(왼쪽에서 4번째) 선생님과 함께. ⓒ 안준철

그들과는 달리 승규는 험한 고비를 넘을 때마다 힘겨워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하긴 월드컵 개막전을 다 보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니 그럴 법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를 업어주기는커녕 일행에서 한참이나 뒤쳐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저는 승규의 손을 섣불리 잡아주지 않았습니다. 조금 앞서 가서 기다려주기도 하고, 때로는 몇 걸음 떨어져 묵언의 응원을 해주면서 함께 산을 올랐습니다.

우리는 산을 오르는 동안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차츰 대화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입으로 나누는 대화보다도 눈빛으로 나누는 대화가 더 울림이 컸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가끔은 우리 모두 혼자만의 침묵 속으로 빠져 들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스승과 제자로서 만나지만 품이 넉넉한 자연이라는 큰 스승 앞에서는 녀석이나 저나 눈빛 초롱초롱한 어린 제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a 조계산 보리밥집에서

조계산 보리밥집에서 ⓒ 안준철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던져주는 백 마디의 훈계나 지식보다도 그들에게 잘 자란 숲이나 한 그루의 나무를 보여주는 것이 더 교육적일 수도 있다고 말이지요. 제가 산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산에 가면 나무와 꽃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나무가 없다면 산은 산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산에 나무가 있다면 인간 세상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산에 있는 나무들은 그 종류에 따라 쓰임새가 다를 뿐 어떤 나무도 다른 나무를 해치거나 피해를 주는 일은 없습니다. 나무는 우리 인간에게도 너무나 많은 것을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고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그렇지 못하지요. 아이들과 함께 산을 내려오는 길에 만난 한 그루의 나무 앞에서 잠깐 묵상을 했던 것은 사실은 그런 부끄러움 때문이었습니다.

a 저 연두빛 푸른 나뭇잎들처럼 우리 아이들의 영혼도 푸르렀으면!

저 연두빛 푸른 나뭇잎들처럼 우리 아이들의 영혼도 푸르렀으면! ⓒ 안준철

자연은 이렇듯 우리 자신의 누추하고 추악한 실존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지요. 아직은 아니더라도 우리 아이들도 자꾸만 산을 찾고 벗하다보면 머지않아 아름다운 자연의 성품을 닮아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토요휴무일만이라도 아이들에게 큰 스승인 자연을 찾게 해주는 날로 정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아이들을 영혼이 없는 점수 기계로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입만 열면 요즘 아이들의 버릇없음을 개탄하는 우스꽝스럽고 모순적인 일들이 사라질 날은 언제쯤일까요?

덧붙이는 글 | 어제 전교조 순천지회가 주관한 '사제동행' 조계산 등반대회는 30여 명의 교사와 교사 가족, 그리고 15명 안팎의 학생들이 참여했습니다. 이런 행사가 더욱 활성화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덧붙이는 글 어제 전교조 순천지회가 주관한 '사제동행' 조계산 등반대회는 30여 명의 교사와 교사 가족, 그리고 15명 안팎의 학생들이 참여했습니다. 이런 행사가 더욱 활성화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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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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