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릿한 삶의 공간 '포구'는 어촌의 상징

포구의 사회사... 정돈된 회 타운보다 생명력 넘치는 선술집이 좋다

등록 2006.06.12 11:43수정 2006.06.12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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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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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 마을이 형성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먼저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물이 필요할 것이고, 먹고 살기 위해 농사를 지을 땅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바다로 한 걸음 나가려면 선박과 포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일찍부터 연안의 지형과 자연자원을 활용해 마을마다 포구를 만들고 배를 건조했다. 거친 바다와 열악한 연안지형을 안고 있는 제주 사람들도 용암이 흘러내린 골을 비집고 용천수를 찾고 포구를 만들었다.


이러한 자연포구들은 해안도로를 만들고 마을어장을 매립하면서 대부분 그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이름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작은 자연포구와 달리 특산물을 지역축제 자원으로 이용하며 포구의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는 곳도 있다. '홍어'의 영산포, '젓갈'의 곰소와 소래 포구, '굴비'의 법성포, '고래'의 장생포, '미역'의 기장 등이 대표적이며 그 외에도 지역에 따라 오징어나 주꾸미, 대하나 과메기, 대게 등을 활용하는 곳도 있다.

육지 것들, 포구에서 대박을 꿈꾸다

포구는 '배가 드나드는 개의 어귀'이며, 개는 '강어귀의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이다. 풀어쓴다면 포구란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면서 배가 드나들기 편리한 곳'쯤 될 것 같다. '개', '선창'으로도 불리는 포구는 제주말로 '코지', '돈지'라고도 한다.

뭐라고 부르든, 어느 지역에 있든 포구라면 갯내음이 물씬 나고 비릿함이 코 속을 후비고 속을 뒤집어야 제 맛이다. 여기에 옴팡지게 들어앉은 술집들이 다닥다닥 이어져 술꾼들 고성이 흘러나오고, 간간이 간드러지는 교성이 터져 나오는 곳이라야 포구답다. 일상을 벗어나 비틀거리는 인간의 일탈마저도 삼켜버리는 곳이어야 포구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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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아무리 작은 포구라도 어시장이 열렸다. 꼭 시장이라 이름 붙이지 않더라도 잡아온 고기를 선창에 던져 놓으면 그대로 흥정이 이루어지고 거래가 성사되었다. 그곳에서 객주들은 돈을 들고 실한 일꾼을 찾았고, 가진 것 없는 민초들은 막노동으로 하루를 이어갔다.


법성포나 영산포처럼 그리고 군산처럼 사람이 모이고 돈이 도는 포구는 장돌뱅이는 물론 남사당패와 술집 작부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조기, 강달어, 민어, 새우, 고등어, 삼치 등 철마다 잡히는 고기 따라 포구에는 흥청거리는 '파시'가 형성되었고, 팔도의 뱃놈들은 기를 쓰고 칠산 바다와 이들 포구를 찾아 인생역전을 꿈꾸었다.

부안군 하서면 돈지에는 작은 마을포구가 있었다. 계화도 간척사업으로 한쪽 날개를 잃고, 새만금 방조제사업으로 어촌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계화도 간척사업이 있기 전까지 돈지포구에는 전주와 군산은 물론 강경, 멀리는 목포와 마산에서 조기를 사기 위해 객주들이 몰려들었다.


일제강점기 돈지포구는 격포보다 컸고, 몇 척의 중선들이 고기들을 잡았다. 포구 근처 갯골에 죽방렴만 막아도 고기들이 지천으로 들었다. 고기가 많이 잡혀 미처 처리하지 못하면 포구에서 징을 쳐 주민들에게 생선을 나눠주기도 했다. 마을마다 이런 작은 자연포구에는 돈깨나 있는 선주가 지은 중선배가 떡 버티고 있었고 조기철이면 마을사람들은 배를 타고 칠산바다와 연평바다를 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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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람들에게 포구는 낯선 땅이었다

자연포구와 달리 목포, 군산 등 큰 선창에는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한 미곡들이 늘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큰 포구의 돈줄은 모두 일본인들이었고, 심지어는 일본은행이 직접 들어와 지점을 설치했다.

일찍 상업에 눈뜬 사람들은 포구에 거점을 두고 섬과 섬, 섬과 육지를 오가는 선박회사를 차려 큰돈을 벌기도 했다. 소금과 젓갈, 조기 등 생선을 싣고 영산강을 따라, 금강을 따라 오르내리며 갯것을 팔아 돈을 챙겼다. 가지고 온 것을 다 팔고나면 포구에서 옷가지 등 생필품을 싣고 다시 섬과 어촌을 오가며 돈을 벌었다.

이런 포구에는 자신의 돈은 아니지만 돈이 흔하고 일거리도 많아 자연스레 땅이 없는 소작농이나 유랑민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영산포나 목포, 군산처럼 강 하구 선창에는 가난한 민초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철따라 선창에서 단순노동을 하고, 농사철이면 갯땅을 일궈 씨를 뿌리며 목숨을 의지했다. 그래서 전라도 사람들을 '갯땅쇠'라고 했다던가. 전라도의 나주평야와 김제평야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섬사람들이 육지로 나가기 위해 첫발을 딛는 곳이 포구다. 육지 것들에게 포구는 바다와 섬으로 드나드는 출입문 같을지 모르지만 '섬사람'들에게 포구는 남의 집 대문처럼 조심스럽다. 심지어 배를 가지고 와 정박하려고 해도 남의 집 마당처럼 어렵고, 생선을 팔려고 해도 제값보다 낮게 쳐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얼굴에 섬놈이라고 쓰여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포구에 들어서면 기가 죽었다.

1960년대, 서해바다를 풍요롭게 했던 조기가 사라졌다. 조기가 사라지자 타격을 받은 것은 어민들과 선주들이었지만 흥청거리던 포구도 덩달아 힘을 잃었다. 배를 부리는 사람들은 고기를 찾아서 더 멀리 나가야 했고, 더 큰 배와 큰 그물을 장만해야 했다.

작은 포구로 들어가는 갯골에 펄이 쌓이기도 했지만, 배가 커지면서 이제 마을 앞이나 강어귀의 작은 포구들을 이용하기 어려워졌다. 조기 대신 멀리 동중국해까지 가서 잡은 갈치들은 목포나 군산 등 큰 항구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근대적인 유통체계가 형성되면서 작은 포구들은 연안어업을 하는 배들을 정박하는 선착장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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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게 정돈된 회 타운보다 포구의 선술집을 찾는다

풍선배와 몇 척의 기계배들이 피항하던 돌로 만든 포구가 시멘트라는 새 옷(?)을 입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어촌 새마을운동 덕분이었다. 선거철이면 포구 선착장과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는 늘 공사 중이었다. 포구가 어민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곳이었기 때문에 표심을 자극하는 정치인들이 이를 그냥 둘 리 없었다.

전국의 섬의 60%가 있는 전라남도는 흑산도와 홍도처럼 먼 바다의 섬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연도 및 연륙을 계획하고 있다. 전라북도도 새만금 방조제가 완공되면서 머지않아 선유도까지 배를 타지 않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다리가 놓이면서 가장 먼저 선창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일상들이 사라질 것이다. 텁텁한 선술집들은 파리를 날릴 것이며 낙지든, 해삼이든 멍게든, 병어든, 주꾸미든 철철이 나는 생선을 놓고 오가는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던 아줌마의 함지박도 사라질 것이다.

제법 모양새를 갖춘 포구들에는 멋지게 정비된 회 타운들이 만들어져 손님들을 부르겠지만, 이들은 선창에 쪼그리고 앉아 소주를 한 입에 털어 넣고 나무젓가락에 감아 먹던 낙지를 찾을 것이다. 섬사람과 특산물을 실은 차들은 포구를 거치지도 않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서울, 부산 등 대도시로 질주할 것이다.

섬과 육지를 연결하던 포구는 '다리'가 만들어지면서 흑백사진처럼 추억이 되어가고 있다. 섬사람들이라고 언제나 배를 타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포구는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머무름과 떠남이,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이제 포구는 고기를 잡고 팔고 희망을 건져 올리는 것보다, 육지의 주차장처럼 배들이 머무는 장소로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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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약 70%가 강, 호수, 바다로 되어 있다. 그래서 지구보다는 '수구'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물을 이용해 일찍부터 사람이나 물건을 이동하는 방법이 발달했다. 자동차를 이용하기 위해서 정거장이 필요하듯이 배를 이용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 포구였다.

다양한 기능들이 축소되긴 했지만 포구는 여전히 어민들의 생업활동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아름다운 포구들이 간혹 영화나 드라마 무대로 소개되어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와 포구를 찾고 있다. 이들이 보고 싶은 것은 박제화된 포구가 아니라 어민들의 생업활동이 이루어지는 삶의 공간으로서 포구다.

거대한 상징물과 건축물을 새로 짓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어민들은 물론 지자체도 아름다운 포구를 만드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포구 그 자체가 이제 단순히 배를 정박하고 생업활동을 하는 공간을 넘어, 어촌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변신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원고는 전북문화예술전문지 [문화저널] 5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원고는 전북문화예술전문지 [문화저널] 5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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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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