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여자? 나치즘의 피해자?

<레니 리펜슈탈 : 금지된 열정>

등록 2006.06.12 14:30수정 2006.06.1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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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문
[박윤수 기자] 아돌프 히틀러를 둘러싼 두터운 호위망을 사전 약속 없이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으면서도 제2차 대전 후 전범재판에서 살아남은 여성이 있다.

‘히틀러의 감독’, ‘나치즘을 정당화한 예술가’라는 불명예와 ‘천재 영화감독’이란 찬사를 동시에 받았던 레니 리펜슈탈(1902∼2003). 그의 일생을 국내 독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최초의 책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마티)이 출간돼 주목을 끈다.

화려한 외모에 항상 흰 옷을 입어 어디서나 눈에 띄었던 레니 리펜슈탈은 정열적이고 자신감에 넘친 여성이었다. 당시 독일 여자들은 비스마르크가 격찬한 3K, 즉 ‘아이(Kinder), 교회(Kiche), 부엌(Kuche)’에 만족하며 살아야 했지만 그만은 달랐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그는 여성으로서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10대 시절부터 무대를 꿈꿨던 그는 무용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공연 중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입고 무용가의 길을 접고 만다. 이후 영화배우로서의 인생을 시작했고 손수 대본을 쓰고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푸른 빛>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며 히틀러의 눈에도 띄게 된다.

히틀러의 막강한 지원 하에 만들어낸 1934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기록한 <의지의 승리>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다큐멘터리 <올림피아>는 ‘파시즘 숭배에 물든 사악한 영화’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당시의 카메라 기술로 촬영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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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올림피아>에서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골인 장면은 세계 스포츠사에 길이 남은 명장면으로 유명하다. 리펜슈탈은 나중에 손기정 선수 부분만 23분짜리 분량으로 재편집해 헌정하기도 했다.

히틀러의 밑에서 리펜슈탈의 재능은 빛을 발했지만 이는 전후 그의 몰락을 이끌어내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나는 나치당에 가입한 적도, 유대인을 박해한 적도 없다. <의지의 승리>는 억지로 주어진 임무였으며, <올림피아>는 역사적인 행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했을 따름이다”라는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죽음만은 면했으나 평생 영화계에 복귀할 수 없었다.


그는 60년대 중반 사진작가로 변신해 아프리카로 건너가 수단 누바족의 생활을 담은 사진집 <누바족의 최후>를 출간하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71세의 나이로 스쿠버 다이빙을 시작해 2000회 이상 잠수를 기록했으며 2002년엔 100회 생일을 기념해 해저 생태를 그린 기록영화 <수중의 인상>을 발표하기도 했다.

저널리스트이자 방송작가인 저자 오드리 설킬드는 그의 눈부신 외모와 히틀러와의 연관성 때문에 간과된 그의 재능과 의지력에 주목한다. 무용가가 되기 위한 아버지와의 싸움, 스스로 각본을 쓰고 영화사를 만들어 지원을 얻어낸 점, 전후 영화계 복귀를 위한 끊임없는 도전 등 무용가에서 배우로, 영화감독과 사진작가로 인생을 변화시킨 모든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것.


마지막 장에선 ‘리펜슈탈의 영화는 파시즘 미학의 전형’(수전 손택), ‘분명 리펜슈탈은 피해자이다’(로이 파울러) 등 그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담아내며 ‘우리가 리펜슈탈을 비난해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회가 무엇을 잃었는지는 별로 생각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레니 리펜슈탈은 위대한 감독일까, 아니면 파시스트 선동자일까. 책 속에 포함된 다양한 영화스틸과 화보는 독자의 판단에 도움을 준다.

덧붙이는 글 | 오드리 설킬드 지음/ 허진 옮김/ 마티/ 2만원

덧붙이는 글 오드리 설킬드 지음/ 허진 옮김/ 마티/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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