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중국에서 부는 '청나라' 열풍

2012년까지 <청사고>가 중국 정사에 편입

등록 2006.06.13 11:24수정 2006.06.1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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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당시만 해도 중국인들에게 버림받았던 청나라가 멸망한 지 꼭 100년만인 2012년에 중국 '공민증'을 얻게 된다. 청나라가 중국 '공민증'을 얻는다는 말은 그 동안 정사(正史)에 편입되지 못한 청사(淸史)가 드디어 중국 정사의 대열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단 역사 분야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에서도 '청나라 열풍'은 막강한 파워를 과시하고 있다. 청나라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TV 드라마가 중국인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점도 그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최근에는 후난성 출신 작가인 탕하오밍의 <증국번 3부곡>이 중국 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증국번은 이홍장과 함께 태평천국(1851∼1864년) 등의 위기로부터 청나라를 구한 '19세기말 중국의 영웅적인 애국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청나라의 3대 성군(聖君)으로 불리는 강희제·옹정제·건륭제를 소재로 한 <낙하 3부곡>은 중국 내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외국으로까지 수출된 소설이다. 얼위에허가 쓴 이 소설은 <옹정왕조>와 <강희왕조>라는 TV 연속극으로도 방영되어 대단한 인기를 누린 적이 있다.

a 몇해 전 중국에서 선풍을 일으킨 역사 드라마 <옹정왕조>. 옹정제는 청나라 제5대 군주.

몇해 전 중국에서 선풍을 일으킨 역사 드라마 <옹정왕조>. 옹정제는 청나라 제5대 군주. ⓒ 김종성

역사 분야에서 불고 있는 '청나라 열풍'

중국 내에서 불고 있는 '청나라 열풍'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역사 편찬 작업일 것이다. 아직 정사에 편입되지 못한 청나라 역사를 중국 정통의 역사 체계 안에 포함시키는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송나라나 명나라 같은 다른 역대 왕조들의 역사는 중국 정사 안에 편입되어 있다. 현재 <송사>, <명사>는 중국 정사인 25사(史)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민족인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역사를 다룬 <요사>도 현재 중국 정사에 편입되어 있다. 여진족 출신인 금나라가 세운 <금사>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청사(淸史)만큼은 현재까지 <청사고>의 형태로 남아 있다. 청사고(淸史稿)의 '稿'라는 표현에서, 청사의 현재 위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원고 형태로 남아 있다는 뜻을 갖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현재 <청사고>라는 책은 나와 있지만, 여전히 제목 상으로는 '원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청사는 아직 <청사고> 수준에 머물러


중국에서 청사 편찬작업이 처음 시작된 것은 청나라 멸망 2년 뒤인 1914년부터였다. 멸망한 청나라의 신하였던 원세개가 중화민국임시정부(북양정부) 총통으로 재직하면서 청사 편찬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13년 뒤인 1927년에 청사(淸史) 원고를 완성하기는 했지만, 정치적 혼란과 재정적 곤란 등의 사정에 기인하여 교열작업도 제대로 거치지 못한 상태에서 다급하게 책을 발행하게 되었다. 당시 여러 가지로 미비한 상태에서 출판했기 때문에 <청사>라는 이름 대신 <청사고>라는 이름을 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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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성

그런데 그 후 <청사고>는 국민정부 하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 <청사고> 편찬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청나라에 충성을 바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청나라를 멸망시킨 신해혁명(1911년) 등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청사고>에 투영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1912년 중화민국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기술을 하면서도 임시대총통이었던 혁명가 손문(쑨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청나라에 편향된 역사적 관점 등이 원인이 되어 <청사고>는 당시 금서로 지정되었다. 이후 국민정부가 새롭게 청사 편찬작업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항일전쟁 때문에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청사를 정식으로 편찬하려는 노력은 항일전쟁 승리(1945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65년에는 중국인민대학에 청사편찬위원회 및 청사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곧이어 발생한 문화혁명(문혁) 때문에 이 사업은 방치되고 말았다.

문혁 이후 방치된 청사 편찬 작업은 등소평(덩샤오핑)의 실권 장악 이후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지난 1983년에 열린 전국사학규획회의에서는 소청사(小淸史) 프로젝트가 채택되었다. '소청사'라는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청사의 전면적인 복원보다는 제한적인 복원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2000년대 들어 청사 복원 대형 프로젝트 시작

청사를 제한적으로 복원하는 것이 소청사라면, 청사를 전면적으로 복원하는 것은 대청사(大淸史)다. 대청사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은 2001년부터다. 2001년 4월 5일 베이징에서 열린 청사편찬좌담회를 시작으로 2002년 8월에는 국가청사편찬영도소조가, 같은 해 12월에는 국가청사편찬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국가청사편찬영도소조는 문화부 등 14개 부처 정부 관리들의 참여 하에 국가청사편찬위원회를 지도하는 기구이고, 국가청사편찬위원회는 학자들의 참여 하에 실제적인 편찬작업을 수행하는 기구다. 그리고 중국인민대학 청사연구소는 청사편찬위원회의 지도하에 일상적인 사무를 집행하고 있다.

2003년 1월 28일 열린 청사편찬공작좌담회에서는 <청사고>를 정사로 만들기로 하는 데에 의견을 모았으며, 이에 따라 청사 편찬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청나라가 멸망한 지 100주년이 되는 오는 2012년이 되면, 총 100권에 총 3500만 자 분량의 정사 <청사>가 선을 보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만주족 출신 청나라의 역사도 중국 정사에 정식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국민통합작업의 일환

청사 편찬 작업을 포함해서 중국 내에서 지금 청나라 열풍이 일고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청사 편찬 작업이 예전부터 제한적으로나마 진행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2000년대 들어 대대적 규모로 진행되는 데에는 특별한 배경이 있다.

그것은 바로 중국 한족이 주도하는 '국민통합작업'이다. 한족은 지금 각 소수 민족을 정신적·물질적으로 통합하여 새로운 국민국가를 건설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중국이 서부 대개발이나 역사 공정에 나선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중국 한족이 청사 프로젝트를 통해 의도하는 목적 중의 하나는 만주족을 정신적으로 통합하고, 나아가 다른 소수민족들도 그러한 방식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3국에서 전개되는 역사전쟁은 영토문제 등과 관련하여 주변국을 의식하는 측면도 있지만, 이처럼 자국민 통합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정치용의 측면도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함께 실립니다.

덧붙이는 글 <뉴스 615>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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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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