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환락지(金環落地) 명당 구례 운조루(雲鳥樓)

구례 운조루에 다녀와서

등록 2006.06.14 14:48수정 2006.06.14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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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6일 현충일에 가족과 함께 구례쪽으로 나들이를 갔다.
화엄사나 연곡사같이 이름난 곳이 아니라 늘 지나치기만 했던 운조루로 향했다. 미리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고, 운조루에 가면 꼭 '호랑이뼈'와 '나무 뒤주'를 꼭 봐야 된다는 정도를 알고 갔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는 류홍수(54년생)가 소유하고 있는 반가의 고옥으로 1776년(영조 52년)에 9대 조부 류이주가 지은 건물로 중요민속문화재 제 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건축 당시에는 78칸으로 지었는데 현재는 60여칸이 보존되어 있다.

이 집은 옛부터 99칸집으로 알려져 왔으며 전국적으로 150년 이상, 삼십칸 이상된 고가 건물은 열아홉 곳뿐이라는데 특히 이 건물은 재료의 크기나 간의 크기가 보기 드문집이다.

풍수지리설로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와 금내리 부근 일대는 충청도, 경상도 등 각지에서 상당한 양반들이 이주하여 집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이 부근 일대에 대한 비기에 금귀몰니, 금환낙지, 오보교취의 세 개 진혈이 있어서 그것을 찾아내어 그곳에 집을 짓고 살면 천운을 얻어 부귀영화가 뜻대로 된다는 신앙 때문이다.

이러한 신앙을 뒷받침하는 사실로서 이곳 류씨댁이 오미리에 있고 이 택지는 현주인의 원조 류부천이라는 사람이 300여 년전에 복거한 것으로서 그 부친이라는 사람은 여기서 서울까지 매일 밤 구름을 타고 왕복했을 정도로 방술에 통한 자였기 때문에 좋은 풍수를 가려서 여기 초석을 정하려 했더니 뜻하지 않게 그곳에서 구석이 출토되어 비기에 금귀몰니의 땅은 정히 이 땅임이 확인되고 이후 류씨는 번영을 거듭하여 지방 제일의 호가로서 재산가가 되었다는 것이며 출토한 구석은 현재 류씨의 가보로 중장되어 있다.

운조루의 규모 및 구조는 조선왕조 귀족 주택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잇으며 사랑과 내방부분은 그 재료가 웅대하고 한 간의 규준장이 크며 건립당시의 위세와 장대함을 짐작케 한다. 현재 대문, 행랑채, 사랑채, 안채, 사당, 연당, 변소가 남아있다.

a 운조루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함께 내수구(앞도랑)와 의수구(섬진강)가 제대로 되어있는 명당터에 자리잡고 있다. 집 앞의 오봉산은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라고 하며,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운조루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함께 내수구(앞도랑)와 의수구(섬진강)가 제대로 되어있는 명당터에 자리잡고 있다. 집 앞의 오봉산은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라고 하며,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 고병하

운조루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함께 내수구(앞도랑)와 의수구(섬진강)가 제대로 되어있는 명당터에 자리잡고 있다. 집 앞의 오봉산은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라고 하며,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류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歸晩)이라 했으며 이 집을 귀만와(歸晩窩)라고도 불렀다. 운조루라는 백호는 <구름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본디 이 집의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혜사'에서 따온 글귀이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서 피어 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의 문구에서 첫머리 두 글자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a 풍수지리를 연구하셨다는 운조루 집안의 후손인 전직 교장선생님이신 유맹효님. 산세와 지세 등 운조루에 관계된 풍수지리에 대한 설명이 끊이질 않았다.

풍수지리를 연구하셨다는 운조루 집안의 후손인 전직 교장선생님이신 유맹효님. 산세와 지세 등 운조루에 관계된 풍수지리에 대한 설명이 끊이질 않았다. ⓒ 고병하

풍수지리를 연구하셨다는 운조루 집안의 후손인 전직 교장선생님이신 유맹효님. 산세와 지세 등 운조루에 관계된 풍수지리에 대한 설명이 끊이질 않았다.

a 운조루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

운조루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 ⓒ 고병하


a 대문에 호랑이 뼈가 걸려있다. 유이주가 한양으로 가던 중 잡은 호랑이인데, 호피를 임금에게 진상하니 ‘백호장군’이라는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대문에 호랑이 뼈가 걸려있다. 유이주가 한양으로 가던 중 잡은 호랑이인데, 호피를 임금에게 진상하니 ‘백호장군’이라는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 고병하

대문 - 행랑채는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작은 내 뒤에 있고 문앞 서쪽에 하마석이 있다. 문의 형태는 솟을문의 형에다 문위에 홍살을 세웠고 화강석의 초석위에 사각 일변 22cm의 기둥을 세웠다. 문짝은 높이 303cm, 폭 135cm, 두께 3.5cm의 판비이며 문턱은 원래부터 없었다.

a 他人能解(타인능해)’ 쌀통인 목독(나무로 된 쌀독)

他人能解(타인능해)’ 쌀통인 목독(나무로 된 쌀독) ⓒ 고병하

통지름 66cm, 높이 114cm 통나무를 파내어 만들었다. 위에는 3쪽을 대어 위닫이 형식으로 입구를 만들고, 아래쪽에 출구를 구멍을 뚫어 막대기로 막았으며 밑에도 통판을 붙였다. 각종 민란과 동학, 6·25 전쟁속에서 운조루가 무사히 230여년간을  버텨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베풀고 살았던 마음이 이 쌀통에 있다고 하겠다.

옆에 있는 큰 쌀궤에서 쌀을 퍼담아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과객용이다. 연말에 쌀이 남아 있으면 손님을 소홀히 대접하였다고 하여 하인들이 주인으로 부터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또 가난한 마을 사람들이 끼니를 걱정하지 않도록 행랑채에 두어 음덕을 베풀었던 흔적을 보여주는 것으로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가훈과 더불어 길이 빛나는 운조루의 상징물이라고 볼 수 있다.

a 아랫사랑채.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하는 공부방과 그 옆에 여름철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귀래정과 마을 노인들이 모여 환담을 나누거나 식객들이 잠시 유숙하는 곳(현재 유실)으로 되어 있다.

아랫사랑채.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하는 공부방과 그 옆에 여름철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귀래정과 마을 노인들이 모여 환담을 나누거나 식객들이 잠시 유숙하는 곳(현재 유실)으로 되어 있다. ⓒ 고병하


a 윗사랑채

윗사랑채 ⓒ 고병하

큰 사랑은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있으며 높이 1.2m의 축대위에 약 22m의 단이 있어 그 위에 세웠고 석재는 할석이다. 기단 중앙에는 폭 1.4m의 육계단이 있고 기단 동쪽에 누마루, 귀래정이 있으며, 사랑초석은 1~1.5m의 방형 또는 부정형의 거대한 화강석을 사용하였고 기둥은 직경 30.3~33.3cm의 둥근 기둥으로서 높이 약 3.2m이다.

큰사랑의 중문쪽 4간은 온돌방, 가운데 4간은 마루방, 서쪽 2간은 누마루 형식으로 되어있고, 지산루, 족한정의 현판이 걸려 있으며 천정은 영등천정이고 (온돌방은 격자천정임) 마루방 양귀는 편자상 끝이 곱게 쳐다 보인다.

온돌방과 마루방 앞에는 뒷마루를 돌리고 밑기둥은 팔각 돌기둥이다. 방사이에는 4매로 된 울림문이고 누마루는 전체 개방식이다. 중문은 사랑과 지붕이 연결되어 온돌방 동쪽에 있으며 초석은 큰 화강암의 석재를 사용하였고 기둥은 1변 25cm 정도의 각주이고 문짝은 252cm, 폭 110cm의 큼직한 판비 한쌍이다.

중문에서 곧바로 나가면 사랑 후정으로 통하는 소판문이 있고, 동으로 가면 안채 안마당으로 통한다. 천정은 다락으로 되어있다.

a 안채

안채 ⓒ 고병하

안채는 96cm 높이의 할석을 쌓아 큰 괴석을 사용, 약 23cm의 둥근 기둥과 1변 25cm 정도의 각기둥으로 세웠다. 두간의 마루방과 온돌방이 있고 서쪽은 부엌간 남쪽은 두간의 창고간이 중간의 안마당 입구에 연결되고 다락으로 되어 있으며 마루방 동쪽은 온돌방이 계속되어 작은 부엌과 헛간이 있고 위는 한국 중부지방 양식이며 귀족계급에 의하여 건립된 주택이다.

a 부엌.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부엌.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 고병하


a 안채 마루. 후손들이 살고 있어서 조심조심 살펴보았다.

안채 마루. 후손들이 살고 있어서 조심조심 살펴보았다. ⓒ 고병하


a 행랑채

행랑채 ⓒ 고병하

운조루는 조선 후기 양반가의 대표적인 주택으로서 당시의 상을 알 수 있는 중요민속자료가 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건물에서 류씨가 대를 이어 살아 오면서 많은 문화재급 생활사의 자료를 잘 보존하고 있어 사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류씨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는 전적료 326종 801책, 고문서 26종 636건, 서화 74점, 민속자료 214점 등으로 조선 후기의 중요한 민속자료가 되고 있다.

또 하나 특기할 것은 류이주의 5세손인 류제양은 일만여편의 시를 쓰고 손자 류형업에 이르기까지 80여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생활일기와 농가일기를 썼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록 문화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위대한 선조들의 유업이라 아니할 수 없다.

# 풍수지리상 길지라 하여 지었다 하나 세월의 무게는 이기지 못하는 듯싶다. 후손들과 문화재 보호 단체의 정성어린 손길이 많이 필요하겠다.

덧붙이는 글 | 내용은 운조루에서 가져온 안내 소책자를 참고했습니다.
제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bhgoh)에도 비슷한 내용이 올려져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내용은 운조루에서 가져온 안내 소책자를 참고했습니다.
제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bhgoh)에도 비슷한 내용이 올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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