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그늘을 거부한 여성들

책 <매혹의 조련사, 뮤즈>

등록 2006.06.19 14:45수정 2006.06.19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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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잘로메(맨 왼쪽)는 철학자인 폴 레(가운데)와 니체의 사랑을 알면서도 두 사람과 공동체적인 삼각관계를 유지했다. 이들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루체른 사진’속에서 채찍을 들고 선 루는 두 남자가 아닌 사진 밖의 우리를 똑바로 응시한다.
루 잘로메(맨 왼쪽)는 철학자인 폴 레(가운데)와 니체의 사랑을 알면서도 두 사람과 공동체적인 삼각관계를 유지했다. 이들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루체른 사진’속에서 채찍을 들고 선 루는 두 남자가 아닌 사진 밖의 우리를 똑바로 응시한다.여성신문
[박윤수 기자]예술·학술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대가들에게는 그들의 파트너이자 조력자, 이른바 ‘뮤즈’라고 불렸던 여성들이 있었다.

‘뮤즈’는 원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학문과 예술의 여신으로 예술적 대가의 영감을 불러일으킨 파트너를 일컫는 말. 여성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인 프랜신 프로즈의 저서 <매혹의 조련사, 뮤즈>(푸른숲)에는 대표적인 대가들의 뮤즈였던 6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존 레논의 예술적 파트너인 오노 요코와 화가 달리의 부인인 갈라 달리, 시인 릴케와 철학자 니체의 영감의 원천이었던 루 잘로메, 루이스 캐롤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모델이 된 앨리스 리델, 사진작가 만 레이의 모델 리 밀러와 무용가 수전 패럴이 그 주인공.

저자는 예술가에게 영감을 제공하는 전형적인 뮤즈상을 뛰어넘어 누구보다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았던 그들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뮤즈들이 어떻게 예술가를 보살피고 때론 그들을 혹독하게 조련시켰는지를 사진과 일기, 편지, 자서전과 예술작품 등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꼼꼼하게 되살려낸다.

저자는 ‘뮤즈는 진화한다’고 주장한다. 앨리스 리델과 같은 초기의 뮤즈는 예술가에게 포착돼 그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워했지만 근대의 뮤즈는 더욱 적극적이고 당당해졌다.

루 잘로메는 철학자 니체와 오랫동안 플라토닉 로맨스를 나누고, 언어학자 칼 안드레아스와는 50여 년간 잠자리 없는 결혼을 유지하며, 시인 릴케와 4년간 뜨거운 연애를 했고, 심리학자 프로이트와는 각별한 친구사이였다. 루는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작품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분석해 혹독한 비평을 책으로 펴내며 당대에 보기 드문 여성의 독립적인 성취를 보여준 인물이었다.

여성신문
살바도르 달리는 갈라 달리를 만나기 전 과격한 성품으로 미술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정신질환에 시달렸던 실패한 화가에 불과했다. 성적인 암시와 욕망이 가득한 달리의 환상적인 그림들은 갈라의 예술적 영감과 훈련에 기인한 것이었고 그는 달리의 근심과 두려움을 덜어주는 보호자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탁월한 사업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해 협상을 하고 달리의 계약서 사인을 도맡으며 세계 화단의 관심을 집중시킨 ‘달리 현상’을 만들어낸 것도 모두 갈라의 업적이다. 달리는 그의 작품에 사인할 때 갈라의 이름도 함께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현대의 뮤즈는 예술가 도우미 역할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예술가로 성장한다. 사진작가 만 레이의 모델이었던 리 밀러는 그와 작별한 후 직접 카메라를 잡고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2차 세계대전 때 종군 사진기자로 전장을 누비며 맹활약했다.


발레리나 수전 패럴은 안무가 밸런친의 작품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무용가로서 자신만의 재능으로 뮤즈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안무가와 동등한 위치에 섰다.

오노 요코는 가장 독립적인 뮤즈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 존 레넌을 만나기 전 이미 전위예술그룹 ‘플럭서스’의 중요 멤버인 예술가이자 여성운동가였던 요코는 항상 자신이 “‘미세스 레넌’이 아닌 ‘오노 요코’”임을 주장했다. 존의 히트곡 <이매진(Imagine)>은 사실 요코의 책 <그레이프푸르트>에서 가사를 빌려온 작품임을 알고 있는지.

아들이 태어난 후엔 존이 가사노동과 아들 양육을 맡고 요코가 부동산 사업에 나서는 등 전통적인 성 역할의 전복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소개된 뮤즈들은 전통적으로 여성들의 딜레마인 가족과 아이, 일 등을 둘러싼 관습적인 의무와 장애에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세기의 작가 로댕의 그늘에 가려 그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고 정신병원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은 카미유 클로델의 삶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는지 모른다. 뮤즈들이 파트너에게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과 예술세계를 지켜가기 위한 고민은 없었는지.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그들의 치열한 내적 갈등엔 눈 감은 채 결과 위주의 긍정적인 면만을 부각한 것은 아닌지 아쉬움이 남는다. 프랜신 프로즈 지음·이해성 옮김·푸른숲·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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