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FC 할아버지', 여의도에 안착할까

허준영 전 청장 정치 첫발... 기대-우려 엇갈린 경찰

등록 2006.06.23 11:34수정 2006.06.24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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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영 전 경찰청장(자료사진).
허준영 전 경찰청장(자료사진).오마이뉴스 권우성
지난 16일 서울성북을 재보궐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공천 신청을 하면서 정치를 시작한 허준영(55) 전 경찰청장에게는 별명이 하나 있다.

'KFC 할아버지'. 중앙경찰학교장으로 재임하던 지난 2002년 학생들이 붙여준 애칭이다. 아닌 게 아니라 허 전 청장과는 썩 어울리는 이미지다. 모자와 흰 양복을 입고, 한쪽 팔에 지팡이를 걸면 영락없는 KFC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듬직한 체구, 게다가 안경까지 걸친 그에게 더 없이 잘 어울린다.

중앙경찰학교의 한 졸업생은 허 전 청장에게 보낸 쪽지에 직접 "정겨운 KFC 할아버지같은 포근한 분"이라고 쓴 적이 있다. 물론 당시 50대 초반이던 허 전 청장에게 이 별명은 조금 충격적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KFC 할아버지'라는 별명이 보여주듯, 경찰 내에서 허 전 청장은 아직도 존경받는 선배다. 게다가 '조직을 위해 외풍(검찰·청와대)을 막다 희생된 불운한 지도자' 이미지도 남아있다. 비록 불미스런 일(농민 사망사건)로 첫 임기제 청장의 임기조차 채우지 못하고 내려왔지만, 여전히 인기가 높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만한 청장 어딨나" 기대에 "야당 초선이 뭘" 우려도

그의 정계 진출에 많은 경찰이 기대감을 나타내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경찰 조직의 한 내부게시판에는 "허 전 청장과 같은 분이 정계로 많이 진출해 경찰의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는 요지의 글이 올라왔다. 또다른 하위직 경찰관은 "그만한 역대 청장이 어디 있었느냐"며 "당선돼서 경찰조직의 발전을 위해 기여해 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경찰이 허 전 청장의 정치행보에 힘을 실어주는 또다른 이유는 갈수록 파워게임에서 밀린다는 판단 때문이다.


허 전 청장이 현직 시절 강하게 밀어붙이던 '수사권 조정'은 그가 떠나자 구심점을 잃은 채 표류하고 있다. 최근엔 경찰의 고민이 한 가지 더 늘었다. 대검찰청이 2007년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는 '통합형사사법체제'가 심각한 검찰의 권력집중을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다.

경찰의 기대는 이처럼 바닥까지 떨어진 위상을 허 전 청장이 다시 올려줄 것이라는데 있다.


반면 우려의 시선도 적잖다. 경찰청 소속 한 경찰관은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서 당선돼 봐야 야당 초선의원일 뿐"이라며 "도대체 무슨 힘이 있겠냐는 게 일부 경찰의 생각"이라고 냉소적인 내부 반응을 전했다.

그는 또 허 전 청장의 야당 국회의원 당선이 "자가당착이자 모순"이라고 말했다. 허 전 청장은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치안비서관, 서울경찰청장을 거쳐 경찰 총수를 지냈다. 정부 최고위직을 두루 거치며 혜택을 받아온 사람이 돌아서서 칼을 든다는 게 가능하겠느냐는 얘기다.

또다른 경찰관도 "허 전 청장은 어쩔 수 없는 정치꾼일 뿐"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30일 허준영 경찰청장의 퇴임식이 서울 미근동 경찰청 강당에서 열렸다. 허준영 총장은 차에 오르기 전 수사권독립 문제에 앞장 서 온 황운하 수사구조개혁팀장에게 다가가 뜨겁게 포옹한 뒤 함께 한동안 흐느껴 울기도했다.
지난해 12월 30일 허준영 경찰청장의 퇴임식이 서울 미근동 경찰청 강당에서 열렸다. 허준영 총장은 차에 오르기 전 수사권독립 문제에 앞장 서 온 황운하 수사구조개혁팀장에게 다가가 뜨겁게 포옹한 뒤 함께 한동안 흐느껴 울기도했다.오마이뉴스 권우성
3개월만에 바뀐 신념... 공천 통과해도 고개 넘어 또 고개

어쨌든 기대와 우려 속에 허 전 청장은 정치에 첫발을 옮겼다. 당장 그의 눈앞에 닥친 첫 시험은 한나라당 공천을 받을 수 있느냐는 문제다. 허 전 청장은 한나라당에 공천을 신청한 이유에 대해 "내 이념과 가치에 근접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여러 차례 밝혔다.

주목할 점은 지난 3월 허 전 청장이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한나라당에 대한 생각이다. 당시 그는 한나라당에 대해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고 비판했다. 또 "정치에 때묻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과 때 새로운 정치를 해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지난 16일 공천 신청 이후의 언행에 비춰보면, 불과 3개월 만에 입장이 180도 바뀐 셈이다.

정치인은 말로써 신뢰를 얻고,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3개월만의 입장 변화에 대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지금은 한나라당 공천 심사를 앞두고 있다.

공천 심사라는 한 고개를 넘더라도 고개는 두 개나 남아 있다. 일단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돼야 하고, 여당과 다른 야당의 비난을 참아내며 정치권에 안착해야 한다.

허 전 청장을 경찰총수에 앉힌 열린우리당 입장에서 그는 '정치 도의를 어긴 배신자'다. 지난해 12월 두 농민의 사망사건을 주도적으로 파헤쳐 경찰복을 벗긴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 그는 '반성없는 권력자'일 뿐이다.

15만 경찰조직의 성원을 얻고 있는 'KFC 할아버지'가 무사히 여의도에 입성할 수 있을지 아직 불투명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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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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