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더 로드> 표지.넥서스BOOKS
박준의 <온 더 로드> 표지엔 앞으로 길게 뻗은 황톳길이 나온다. 금방이라도 뽀얀 먼지를 내뿜을 것 같은 노란 길 오른쪽에선 큰 물소 두 마리와 아기 소 두 마리가 땅에 머리를 박고 먹는 듯 쉬는 듯, 선 듯 가는 듯하고 있다. 길 왼쪽엔 외떨어진 아기 소 한 마리가 오른쪽 네 마리와는 약간 어긋난 쪽으로 걷고 있다.
파란 하늘밑에 열대림이 가로로 길고 얇고 멀게 펼쳐져 있고 농가라고 보기엔 제법 큰, 마치 사육장 같은 건축물이 오도카니 서 있다.
<온 더 로드>의 부제는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그런데 표지엔 사람이 없다. 소가 있으면 목동이 있음직하고 집이 있으면 호구 마련에 바쁠 어른은 그늘막에서 땀을 흘릴지언정 한가한 어린애들은 나와 놀만 한데, <온 더 로드> 표지엔 사람이 없다.
표지의 노란길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아래 음악이 찢어질 듯 터져 쏟아지고 노천카페, 레스토랑, 여행사, 책방, 쉼터가 즐비하고, 갓 여행을 나선 초보자부터 몇 년씩 여행 중인 숙련자까지 크고 작은 배낭을 이고 메고 모여드는 카오산으로 가는 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이 없는 물소가 선 듯 가는 듯 하는 인적 없는 황톳길은 <온 더 로드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이라는 제목과 제법 어울린다.
버리고, 버리고 잊고, 잊어버려야 하지만…
여행에 관한 책은 떠날 수 없어 '남겨진 사람'에겐 형벌이다. 언젠가 떠날 수 있다는 기대,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만난다는 설렘, 더 밝은 하늘과 짙은 향기를 내뿜는 대지가 주는 기쁨을 만끽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직도 떠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좌절, 떠날 수 있는 자들에 대한 질투, 배부른 남을 바라보는 배고픈 자의 시기가 얽히고설켜 괜한 괴로움만 는다.
<온 더 로드>의 주인공처럼 나도 떠날 수 있다. 이것 팔고 저것 해지하고 요것 찾으면 수년은 힘들겠지만 수개월은 떠날 수 있다. 머리는 짧지만 오색실 붙이면 레게머리를 할 수 있고, 초록색 두건으로 세월이 훌쩍 넓혀놓은 이마를 가릴 수 있고, 비닐봉지에 한껏 담은 열대과일 음료를 홀짝거리고, 흔적만 남은 이두박근에 '착하게 살자'라는 타투를 그려 넣을 수 있다.
나도 맘만 먹으면 큼직한 등짐 지고 두툼한 봇짐 안고 체 게바라가 담배 피우는 티셔츠를 입고 헐렁한 반바지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 샌들을 끌고 노천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홀짝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난 버리고 가기엔 아까운 것이 너무 많다. 5수 끝에 겨우 잡은 직장은 하루아침에 털어내기엔 미련이 너무 많고, 결혼 10년 만에 이곳저곳 손 벌려 마련한 집은 아직 갚아야 할 대출금도 많이 남아 있다. 내일 회의를 위해 오늘 밤 준비해야 할 자료가 너무 많고 친목, 동창, 운동, 동호회 등 나가야 할 모임도 많다.
버릴 수 없는 게 너무 많은 난 버리고 떠난 <온 더 로드>의 사람들이 무지하게 얄밉다. 그래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노랫말 때문에 '이렇게 살면 안 되지'하며 훌쩍 떠나는 걸 보며, 김광석보다 송대관의 '해뜰 날'의 노랫말이 인생살이에 더 힘이 된다고 우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