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방송(SBS) 대하드라마 <연개소문>이 '안시성 전투(645년)'를 시작으로 지난 8일 막을 올렸다. 이 전투는 흔히 '토산(土山) 싸움'과 '당 태종의 철군'으로 기억되며,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이 전투는 당나라(618∼907년)가 건설하려던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의 의미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 주변의 민족들이 하나같이 중국에게 복속하던 시기였다. 이때 절대 열세였던 고구려가 당대 최강 당나라를 물리친 기적적인 전쟁이었기에 안시성 전투는 역사적 의미를 띠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안시성 전투가 벌어진 시대는 당나라가 수나라(581∼618년)의 뒤를 이어 새로운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대규모 침략 전쟁을 벌이던 시대였다. 당시 수·당이 내세운 목표는 진·한 시대의 국제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안시성 전투,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대한 도전
진(秦)나라 시황(始皇)에 의해 통일된 중국은 다음 왕조인 한나라(BC 202∼AD 220) 시기에 이르러 그 원형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진·한 시대에는 한족이 구상하는 중화 세계 질서의 원형도 구축되었다.
당시 한족이 구상한 것은 중국 주변의 이민족들을 중국의 행정단위인 군·현에 복속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형식적으로나마 이민족에 대한 '직접 통치'를 관철하는 것이었다. 한나라가 고조선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것도 형식적으로나마 한민족을 중국의 군현체제에 편입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한나라는 한민족, 흉노족, 월족(베트남)의 영토에 자국의 군·현을 설치할 수 있었다. 이민족 지역에 설치한 군·현에서 한나라의 통치가 실제로 관철된 것은 아니지만, 당시 한나라는 형식적으로나마 이민족들을 자국의 행정체계 안에 편입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던 것이다(군현제적 국제 관계).
한족의 이상은 이민족에 대한 직접 통치
그런데 이러한 군현제적 국제 관계는 한나라 이후에 중국이 분열 양상을 보임에 따라 그 기초가 흔들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나라 이후에 삼국시대(220∼280년)와 5호 16국 시대를 거쳐 남북조(420∼589년)에 들어서면서 중국은 장기간의 분열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후 내부적 분열을 겪는 상황 속에서 더 이상 중국이 이민족들을 자국의 군현제 안에 묶어둘 수는 없었다. 외부보다는 내부의 과제가 더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특히 남북조 시대에는 군현제적 국제 관계가 사라지고, 막부제적 국제 관계라는 다소 이완된 형태의 새로운 국제 관계가 출현하였다.
중국 인민출판사 발행 <중국 정치제도 통사> 제4권에 잘 소개된 바와 같이, 막부(幕府)는 한나라 중엽 이후에 출현한 지방 군사정권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한나라 중엽 이후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이완되면서 지방에 막부 형태를 띤 독립적인 군사정권들이 출현하였다. 이로 인해 중앙 정부가 지방 막부에게 광범위한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자국 지방정권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 하에서 이민족들을 직접 통치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남북조 시대의 중국 왕조들은 자국에 복속하는 이민족들을 막부처럼 대우하면서 보다 더 광범위한 자율성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막부제적 국제 관계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군현제적 국제 관계는 형식적으로나마 직접 통치의 겉모습을 띠었던 데 반해, 막부제적 국제 관계는 실질적으로는 물론 형식적으로도 이민족에게 광범위한 자율성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특징적인 것이었다.
이는 남북조 분열기에 이민족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약화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같은 시기에 고구려가 중원을 위협할 정도로 성숙하였던 것도 이러한 중국의 분열을 배경으로 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이 수·당 출현 이전의 동아시아 국제 정세였다.
남북조 시기에는 '직접 통치' 좌절
그런데 589년에 수나라가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전역을 통일함에 따라 동아시아 세계에도 일대 변화가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오랜 분열을 극복하고 내부적 통일을 달성한 중국이 국제 관계에서도 '욕심'을 내게 된 것이다.
그 욕심이란 것은 앞서 언급한 군현제적 국제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내부적 통일을 달성한 중국이 그 여세를 몰아 주변 이민족들을 다시 중국의 행정 체계 안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수·당에 의해서 추진된 이 새로운 국제관계는 기미부주(羈縻府州) 관계, 도호부적 국제 관계 등으로 불린다. 수·당이 이민족들을 자국의 행정단위인 부·주 혹은 도호부 안에 편입시키려 했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진·한 시대와 비교할 때에 행정단위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중국이 의도한 국제 관계의 본질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주변 이민족들을 자국의 행정체계 안에 편입시킴으로써 이민족에 대한 직접 통치의 이상을 달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수·당은 '직접 통치' 부활 시도
수·당의 통일제국이 추진한 이 새로운 국제 관계 앞에서 다른 이민족들은 대개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수·당의 기세에 눌린 동아시아 여러 민족들은 새로운 중화 국제질서에 순응함으로써 살길을 모색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내의 모든 민족이 수·당 통일제국에게 복종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민족들은 모두 중국에 순응함으로써 살길을 모색하려 하였지만, 그런 생존 방식을 기꺼이 거부한 민족이 있었다.
중국 주변의 모든 민족이 수·당 통일제국에게 복종한 것이 아니었기에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에 쳐들어오고, 당나라 태종도 고구려에 쳐들어왔던 것이다.
수·당 통일제국에 적극 대항한 고구려
이처럼 중국이 남북조 분열기를 극복하고 수·당 통일제국으로 접어들던 과도기에 중국 주변의 다른 민족들은 새로운 중화 국제질서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고구려만큼은 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원전 108년 고조선 멸망으로 한민족이 형식적으로나마 중국의 군현체제에 편입되었던 사실을 뼈아프게 기억하고 있던 고구려인들은 한민족이 또다시 중국의 행정체계 안에 편입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였던 것이다.
수적으로 보나 국력으로 보나, 절대 열세에 놓였던 고구려인들이 오로지 단결심과 용기로 중화 국제질서에 끝까지 대항하였기에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이 '고구려'라는 말에 일종의 심리적 거부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동아시아 세계제국 당나라의 동진(東進)을 격퇴시킨 싸움이기 때문에, 근 1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안시성 전투가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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