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놈의 개에겐 부처의 자비심이 없나?

고요함이 묻어나는 위봉사

등록 2006.07.13 09:10수정 2006.07.13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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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아름드리 소나무. 그 옆으로는 탑이, 뒤로는 보광명전이 보인다.

아름드리 소나무. 그 옆으로는 탑이, 뒤로는 보광명전이 보인다. ⓒ 김현


꽃이 진다.
적멸의 순간, 눈을 뜰 수 없어
눈을 감는다.

마음속 실지렁이 같은 어둠
목탁 소리에 하나 둘 벗어 내리지만
속세에서 쌓아온 세월
퍼내도 퍼내도 떠도는 정이여!


삼경의 산새 우짖는 고요
부푼 가슴 부여안고 떨어보지만
찬이슬 내리는 밤
눈도 감고
마음도 감고
오욕칠정을 칭칭 감아
바라본 하늘
아, 웃으시는 얼굴이여.


산사의 이른 오후는 고즈넉함에 젖어있다. 일주문 앞에 서자 맨 먼저 '개조심'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개조심이라니? 절밥 3년이면 개도 불경을 읊는다고 했는데 이곳의 개는 자비심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든다.

a 위봉사 들어가는 일주문

위봉사 들어가는 일주문 ⓒ 김현


아내와 아이와 함께 지난 6월 중순 위봉사를 찾았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추줄산 중턱에 있는 위봉사는 비구니 스님들이 도량을 닦는 산사이다. 백제 무왕(604년) 때 서암(瑞巖)이 창건하고, 고려 공민왕(1359년) 때에 나옹(懶翁)이 중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신라 말기 사람 최용각이 전국 산천을 유랑하다 이곳 봉산 꼭대기에 올랐을 때 어느 풀섶에서 상서로운 빛이 비치고 있었다 한다. 그 빛을 따라가 보니 봉황새 세 마리가 한가로이 날고 있어 이곳에 절을 짓고 위봉사(圍鳳寺)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추줄산 위봉사라고 적혀 있는 일주문을 지나니 지장전이 나타난다. 지장보살을 모셔 놓고 있는 지장전은 한창 공사 중이다. '옆으로 돌아가세요'라는 길 안내 쪽지가 옆에 붙어 있다.


위봉사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건 스님들을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운 좋게도 절의 뜰 한가운데 아름드리 서 있는 소나무 아래에서 무언가 하고 있는 스님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스님 뭐 하세요?" 햇살 같은 맑은 미소를 띤 답이 돌아온다. "풀을 뽑고 있지요."

a 정경이 아늑하다 못해 고요하다

정경이 아늑하다 못해 고요하다 ⓒ 김현


그 대답에 장난기가 발동해 '스님, 풀도 생명이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자랐을 불초(佛草)일 텐데 자비를 베푸셔야 되는 건 아닌지요'하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겨우 닫아 둔다. 그러면서 하나의 싯구가 떠오른다.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에 나오는 "왜 사냐건 / 웃지요"하는 구절이다. 당나라의 '시선'으로 불리는 이백의 '산중문답'에 나오는 "笑而不答心自閑(웃으며 답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절로 한가롭다)"이나 "왜 사냐건 / 웃지요"나 스님의 "풀을 뽑고 있지요"나 뭐 다를 게 있나 싶다.


속인의 물음에 대한 탈속인들의 대답은 표현만 다를 뿐 모두 같은 것이 아닌가. 스님과 몇 마디 더 나누려다 잡초 뽑는 손길을 방해할까봐, 그만두고 절 구경에 나선다.

절을 구경하면서도 일주문 앞에 적혀있던 '개조심'이란 글귀가 생각나 개를 찾아봤지만 보이질 않는다. 사람도 없다. 절집에 들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항상 고요하다. 고요해서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어쩌다 몇몇 스님이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가벼운 걸음을 옮기며 나는 적삼 부딪치는 소리가 고요를 흔들고 있다고나 할까.

보광명전이란 현판이 보인다. 보물 제 608호인 보광명전은 목재를 조선 중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중안에 금칠을 한 아미타불 부처님을 모셨다. 좌우엔 서 있는 부처가 여럿 있고 뒤엔 살이 비칠 것 같은 흰옷을 걸친 관음보살상이 인자한 모습으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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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


관음상은 어느 절에 가나 인자한 어머니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관음상에 눈길 한 번 더 주고 옆 건물을 보니 그림 하나가 시선을 끈다. 신선들의 그림이다.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 같은 세 신선 쪽으로, 다른 한 명의 신선이 학을 타고 오는 모습이다. 그 그림을 보고 딸아이가 "어떻게 사람이 새를 타고 다니느냐"고 불쑥 묻는다. 어린 눈에 늙은 할아버지가 새를 타고 노니는 모습이 이상해 보였나 보다.

그림 속의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신선이라고 이야기해줬다. 알겠다는 뜻인지 고개를 끄덕인다. 보광명전의 오른편에 승려들이 거주하는 요사체가 있다. 담장으로 막혀 있어, 내방객들의 시선이 별로 가지 않은 곳이다.

출입문으로 들어가려 하니 갑자기 개가 짓는다. 아주 사납게 짖어댄다. 입에 거품을 물고 대드는 품이 '여기 들어오면 안 돼!'하는 험악한 표정이다. 요란스럽게 짖어대는 통에 요사체는 구경하지도 못하고 딸아이의 눈물만 보아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놈의 개(진돗개라는데 진돗개보다 몸통이 더 크다)는 자비로운 부처의 불심이 없나 보다. 아무리 여자들만 거처하는 비구니 거처에 낯선 나그네가 들어왔다손 치더라도 저리 요란을 떨며 쫓아낼까. 야속하게 푸념하고 있는데 딸아이가 무섭다며 어서 가자고 잡아끈다.

a 종각사물이 있는 종각. 이곳엔 법고, 범종, 목어, 목어 뒤 운판이 있다. 이 법구들은 예불과 법회 시간을 알려주며 모든 만물 중생이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어 열반락을 얻기를 가원하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종각사물이 있는 종각. 이곳엔 법고, 범종, 목어, 목어 뒤 운판이 있다. 이 법구들은 예불과 법회 시간을 알려주며 모든 만물 중생이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어 열반락을 얻기를 가원하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 김현


딸아이의 손을 잡고 산문을 나오기 전 종각 앞에서 앞산을 바라봤다. 웃어넘기는 속설에 따르면, 위봉산 맞은편에 보이는 산의 형세가 여성의 마음을 흔드는 모양과 기운을 품고 있어 이곳 위봉사 비구니들의 고요한 마음에 파문을 놓는다고 한다. 아마 말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승들이 있으니 우스갯소리로 한 거겠지만 이곳에 올 때마다 은근히 산의 모양을 바라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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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


그러나 산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인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햇살을 가득 물고 푸른 미소만 띄울 뿐이다. 절집을 뒤로 하고 위봉산성을 지나 달리는 차창 바람이 시원하다. 개짓는 소리에 놀랐던 딸아이도 동생과 노래를 부른다. 아내는 아이들의 노랫소리에 미소를 띠고 스치는 산을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 위봉사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위치한 절입니다.

덧붙이는 글 위봉사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위치한 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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