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수염이야, 꼬리야?

[달팽이가 만난 우리꽃 이야기 39] 큰까치수영

등록 2006.07.14 17:59수정 2006.07.1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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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햇살이 따가운 여름산길을 걷다보면 풀 섶에 고개를 내밀고는 옹기종기 모여 피어있는 하얀 꽃을 만날 수 있다. 초록바다에 하얀 파도가 일렁이는 듯하여 가만히 바라보면 시원한 느낌을 주는 꽃이다.

까치수염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수염, 수영의 혼용이 어디에서 왔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나는 두 가지 이름이 다 좋다. 수염이라는 이름이 붙어도 좋은 이유는 꽃을 꺾어 코 밑 양옆으로 붙이면 훌륭한 카이젤 수염이 될 듯하고, 물가가 그리워지는 여름철에 피니 수영이란 이름도 좋다.

바닷가 바위틈에서 자라는 갯까치수영이라는 식물이 있다. 그것도 하얀꽃을 옹기종기 피우는데 아이들에게 그 이름을 각인시켜 주기 위해서 "까치가 바다에 수영하러 왔다가 피어난 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꽃을 보더니만 동물들의 '꼬리'가 생각이 난다고 했다. 아이들의 눈썰미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꼬리풀꽃도 색깔만 다를 뿐 영락없이 큰까치수영과 비슷하게 생겼고 북한에서는 이 꽃을 '큰꽃꼬리풀'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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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아이들과 꽃산책을 하다보면 참 즐겁다. 아이들에게 풀 섶에 이토록 다양한 꽃들이 계절마다 피고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즐겁지만 간혹 아이들이 던져주는 말들이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큰까치수영 두 줄기를 꺾어 카이젤수염처럼 얼굴에 대니 그 모습이 우스운지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꼬리를 닮았다고 하던 막내는 얼른 아빠 흉내를 내면서 줄기를 꺾어 엉덩이에 대고는 살랑살랑 흔들어 댄다.

까치수영은 어릴 적 흔하게 보던 꽃이었다. 어른이 되어 꽃에 관심을 갖고 난 이후 제주에서 몇 차례 이들을 만난 적이 있지만 바람 때문에 제대로 담질 못했다. 바람 잔잔한 날 다시 오리라고 생각하고는 때를 놓치고, 일년 기다렸다가 무심코 지나쳤던 꽃 중 하나다. 삼각대가 무색할 만큼 바람이 많았던 곳이 제주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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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울 할머니 무덤 가는 길가에 핀 하얀꽃
작은 바람도 반가워 꼬리를 친다.
피어난 꽃 하나, 둘, 셋, 넷…
세다보면
피어날 꽃도 하나, 둘, 셋, 넷…
세어달란다.

하얀 깃털 달고 있는 까치를 닮았나
하얀 꼬리 달고 있는 멍멍일 닮았나
하얀 수염 달고 있는 염소를 닮았나

울 할머니 무덤 가는 길가에 핀 하얀꽃
작은 이슬도 무거워 고개 숙인다.
꽃마다 맺힌 이슬방울
세다보면
꽃 한 송이 두 송이 피어난다.
-자작시 '큰까치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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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부지런한 것들은 이미 피었다 졌고, 조금 늦은 것들은 이제 한창 피어나고 있다. 풀섶에 숨어 외롭게 피어있는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 옹기종기 모여 피어나니 초록 숲에 파도가 쏴하고 밀려와 잠시 머물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런 착각의 순간, 눈만 시원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시원해진다.

민까치수염, 홀아빗대라고도 부르는 꽃, 홀아비꽃대와 비슷하기도 하니 홀아빗대라는 이름에는 끄덕여지는데 산까치도 아니고 민까치는 도대체 무엇일까?

민꽃식물을 은화식물(隱花植物)이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숨어서 피어나는 꽃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드러내놓고 피는 꽃이 아니라 수줍어 숨어 피어나는 꽃,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피어나는 꽃, 아니면 은둔자들처럼 세상일을 피하여 숨어 피어나는 꽃은 아닐지 상상해 본다.

산길 어디에나 피어나던 꽃들 중에서 사람을 피해 은둔한 꽃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본다. 그랬구나, 그 인내심 많은 꽃들 햇살 한 줌 흙 한 줌만으로도 만족하며 피어날 줄 아는 꽃들도 이젠 점점 사람들의 세상을 떠나 은둔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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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도시생활을 하다 보니 일주일에 한번 산길을 걷는 시간을 내는 것도 쉽지가 않다. 또 시간이 있어도 올해는 주말마다 왜 그리 비가 자주 내리는지 많은 꽃들을 만나지 못했다. '꽃은 때가 아니면 피지 않으며 절대로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하는 시간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고 싶은 것 다 만나며 살아가는 사람,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하며 위로를 한다. 그리고 만나지 못한 것들이 있음으로 인해 또 숲길을 천천히 걸어가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이리라.

숲은 숲의 걸음대로 걸어가고, 나는 나대로의 걸음을 걸어간다. 간혹 그 걸음걸이가 달라 엇갈릴 때도 있지만 그래서 서로를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숲은 그냥 제 길을 갈 뿐이고, 나를 그리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자연을 닮을 사람이라도 그들에게는 어쩌면 적일지도 모를 일이니까.

내일, 산길을 걸을 것이다. 큰까치수영이 꼬리를 치며 나를 반겨줄 것이다. 그러면 지난 주 아이들과 함께 나눴던 이야기들이 떠오르며 내 입가에 웃음이 번질 것이다.

"이게 수염이야, 꼬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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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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