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먹을게 없다”... 사회불신 큰 문제

웰빙 추세에 맞춰 식품 강박증까지 초래... 유해식품 사고방지 제도·인식 뒤따라야

등록 2006.07.18 12:10수정 2006.07.18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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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를 구입한 두 젊은 여성이 햄버거 고기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햄버거를 구입한 두 젊은 여성이 햄버거 고기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여성신문
[전세화 기자] 전 제과업체 직원이 가공식품의 위험을 낱낱이 밝힌 책 ‘과자의 공포’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최근 발생한 급식사고뿐 아니라 광우병과 조류독감 등 식품 안전에 ‘빨간불’이 켜지는 일련의 사태는 사회 전체를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식품의 위험성에 대한 폭로는 ‘웰빙’ 추세와 함께 믿고 먹을 수 있는 식품에 대한 사회적 강박관념까지 낳고 있다. 육식을 기피하고, 가공식품보다 자연식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2000년 이후 인터넷에 채식전문 사이트가 붐을 이뤘고, 채식전문 레스토랑과 채식동호회도 부쩍 늘었다.

또 농약 등 인체에 유해한 화학물질을 사용하지 않거나 극소량만 사용한 유기농 식품이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마켓·오’ ‘한쿡’ ‘현미건강 뷔페식당’ 등 유기농 레스토랑은 즐겨 찾는 마니아들로 연일 붐빈다.

그뿐인가. 녹차나 검은콩, 청국장, 석류 등 몸에 좋다는 음식은 매스컴에 소개되기 무섭게 날개 돋친 듯이 팔린다.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집착은 건강을 위해 되도록 적게 먹는 현상까지 빚고 있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먹거리 열풍에는 미디어의 역할이 컸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TV 프로그램 ‘잘 먹고 잘 사는 법’이 방영된 이래 안심하고 먹을 수 있고, 몸에 좋은 음식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급속히 고취된 것이 사실이다. ‘잘 먹고 잘 사는 법’ 외에 현재 ‘행복한 밥상’ ‘웰빙 맛 사냥’ 등 웰빙 음식 관련 TV 프로그램이 봇물을 이루며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을 부추기고 있다

미디어의 역할보다 근본적으로는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증가하고 있는 ‘삶의 질’에 대한 욕구와 자연주의를 추구하는 변화된 라이프스타일이 먹거리 강박증을 불러온 사회적 배경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국내에서 자연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이후. 사람들은 화학물질의 남용과 그에 따른 심각한 부작용을 목격하고, 산업화가 초래한 인공적인 삶에 대해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자연에 따르는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웰빙 먹거리에 대한 집착이 나왔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식품 안전성에 대한 강박증’에 빠진 우리 사회를 ‘사회적 불신과 불안감’에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높은 삶의 질을 향한 욕구는 인간이 태고 적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본능일 뿐,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게 황 교수의 의견이다.


그는 “몸에 해로운 음식에 대한 언론 보도가 나가고 나면, 개인 혹은 가족 차원에서 인공조미료를 적게 쓰고, 자연식품 등 건강식을 찾는다”며 “이러한 각자의 노력은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불안감을 씻을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안전한 음식문화는 개인의 식습관이 아닌, 사회의 제도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황 교수는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사회적 강박관념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해식품사고를 방지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와 인식의 변화와 함께 사회적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안적인 먹거리 운동 실천하는 사람들

먹거리에서 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웰빙’ 열풍이 불고 있는 가운데 여성들을 중심으로 대안적인 먹거리 운동을 실천하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안전한 먹거리를 찾기 위해 시작된 이들 단체에선 장과 김치 등 우리 고유 먹거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개발 보존하려 애쓰며 좋은 농산물을 공급하기 위한 직거래 운동을 함께 하기도 한다. 친환경 먹거리 보급에 앞장서는 대표적인 단체를 소개한다.

■ 수수팥떡
먹거리와 생활 속에서 자연건강법을 실천하는 엄마들의 모임. 2001년 아토피성 피부염, 천식 등 알레르기성 질환을 가진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결성했다. 이들은 간장, 된장, 고추장, 김치 등 우리 고유의 먹거리를 보존하고 알레르기를 극복하기 위한 자연요법, 임신부를 위한 태교·자연출산 교육, 모유 먹이기 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정기적으로 생활단식강좌, 임신부특강, 아토피특강, 가족캠프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한다. 문의 02-3481-0339, www.asamo.or.kr

■ 다음을 지키는 사람들
환경정의에 딸린 산하모임으로 2000년 초 ‘다음을 지키는 엄마모임’이라는 공부모임에서 시작됐다. 자연주의 육아교육을 실시하는 생태분과, 대안적 먹거리를 찾는 먹거리 분과, 유해화학물질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생활환경 분과 등의 활동을 한다. 2004년엔 한 달간 패스트푸드로 생활하는 한국판 ‘슈퍼 사이즈 미’ 실험을 개최했고 ‘아토피를 잡아라’(시공사), ‘차라리 아이들을 굶겨라’(시공사) 등의 책을 펴냈다. 문의 02-743-4747, www.eco.or.kr

■ (사)생태유아공동체
2000년 아이들에게 안전한 먹거리를 보급하기 위해 부산의 학부모, 교사, 유아원 원장들이 모여 시작한 먹거리 공동체. 양질의 친환경 농산물과 아이들을 위한 식단을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공급하고 사탕·과자·탄산음료 안 먹기 등 먹거리 교육과 학부모 교육을 실시한다. 최근엔 자연분만, 모유 먹이기, 생태유아교육 프로그램 개발 등으로 활동을 넓혔고 2005년 ‘수도권생태유아공동체’도 발족했다. 문의 051-583-4554(부산), 02-3158-0364(수도권), www.ecokid.or.kr

■ 녹색연합
녹색연합은 2002년부터 ‘음식이 세상을 바꾼다’는 모토 아래 건강한 먹거리를 보급하기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화학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재료 고유의 맛을 살린 건강하고 소박한 요리를 공모하는 ‘생생요리축제’를 개최해 1000여 개의 요리법을 수집하는가 하면 이중 100여 가지를 추려 ‘자연을 담은 소박한 밥상’(북센스)을 출간했다. 문의 02-747-8500, www.greenkorea.org

한국형 ‘웰빙’ 트렌드는
‘잘 먹고 잘 살자’ 개인부터 기업까지

웰빙은 전세계적 현상이다. 환경 재해 등의 위협과 저출산 위기가 웰빙을 더욱 더 부추기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웰빙’은 무엇일까. 확실히 채식·생태주의와 같은 사회대안운동으로 시작한 구미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삼성경제연구소(SERI)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2000년 이후 대중매체를 통해 웰빙 개념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기업이 주도적으로 상품판매를 위한 마케팅 전략으로 이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구미에서는 주로 유기농 식품에 초점이 맞춰져 한정된 시장을 형성했지만 한국은 식품을 넘어 가전, 건설 등 전 산업분야에 걸쳐 웰빙 열풍이 불고 있다. 특히 2002년 최악의 황사, 광우병 사태 등으로 나타난 환경 재해는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 건강 관련 상품에 대한 관심을 높였고, 기업들은 웰빙 마케팅에 주력해 관련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2000년 당시 공기청정기 시장의 규모는 1000억 원대였지만 불과 3년 뒤인 2003년에는 세 배 이상인 3200억 원으로 급속한 성장세를 보인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한국의 웰빙은 철저히 개인 중심적이다. 개인의 건강과 행복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유기농 음식을 먹고, 친환경 소재로 만든 옷을 입고, 건강에 유익한 소재로 지은 집에 살기를 원한다. 반면 구미에서는 복지 개념을 강조한 사회적 웰빙을 중요시한다. 나 개인도 중요하지만,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친환경 제품을 소비한다. 즉, 생활 속에서 웰빙을 실천하는 일종의 운동적 성격이 강하다. 실제로 구미에서는 90년대 이후 웰빙이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 파고들었지만 ‘웰빙’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다고 한다.

고령화 속도가 빠른 우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웰빙은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아 점차 보편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주5일제 근무제 확대 등 생활 패턴의 변화로 인해 웰빙을 접목할 수 있는 분야도 크게 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 한 예로 레저용 차량의 판매량은 98년 16.5%에서 2003년 41.9%로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개인적 웰빙에서 출발한 한국형 웰빙도 사회 전체의 건강과 행복으로 그 범위를 넓히고 있다. 웰빙 마케팅을 발판 삼아 상품 판매에 열을 올렸던 기업들도 웰빙 경영에 뛰어들 정도로 웰빙은 이제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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