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가족사진

빗줄기를 뚫고 들려온 아버지의 목소리

등록 2006.07.20 18:43수정 2006.07.20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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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방학이면 우리는 아버지가 계시는 강원도 원통을 찾았다. 땅거미 질 무렵까지 최전방의 관사로 가기 위해 춘천을 지나고 한계령 고개를 넘어 한참을 달리니 저만치에 군인관사가 보인다. 모처럼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라 마냥 행복했지만 어린 시절 내내 부모님과 떨어져 생활한 것이 가장 큰 슬픔이었다.


충성스런 군인이었던 아버지로 인해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도 간직하게 되었지만 늘 떨어져 있었던 그 시간들은 그리움에 가슴 아픈 추억일 따름이다.

우비를 입고 트럭 짐칸에 앉아 비껴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었던 어린 시절! 그 때의 그 장소 모두 가물가물 하지만 8살 때 가족사진을 찍던 순간만큼은 너무도 또렷하다.

8살때 찍은 빛바랜 가족사진
8살때 찍은 빛바랜 가족사진김귀자

다정했던 아버지와 함께 스케이트를 타던 순간들
다정했던 아버지와 함께 스케이트를 타던 순간들김귀자

다정했던 아버지와 함께 스케이트를 타던 순간들, 램프를 비추며 밤새도록 경이롭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관사 앞에서 눈싸움을 하던 순간들이 지금도 떠오른다.

그때 부모님의 나이가 지금의 나보다 더 젊으셨는데. 엄마 아빠가 그리워 해마다 어버이날이 되면 카네이션을 들고 공원을 거닐며 눈물을 훔치며 불렀던 노래 'Mother of mine'.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던 1991년 4월 29일 오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수업을 하던 내게 갑자기 비보가 날아들었다. 마지막 돌아가실 때까지 늘 곁에서 명랑한 모습으로 아버지께 웃음을 안기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던 동생이 가슴 아프게 떠오른다.


그런 내 마음을 아셨던 것일까! 교무실을 나오려는데 하염없이 퍼붓는 빗줄기를 뚫고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귀자야, 아빠 갈게. 잘 있어라'. 아주 편안하면서도 고요한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남편이 빗길을 뚫고 속력을 내기 시작하자 그때까지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순간이 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찍었던 비디오를 틀어놓고 TV를 부둥켜안고 우는 동생을 어떻게 위로할 길이 없었던 그 순간.


집안의 전부였던 아버지를 잃고, 이어진 화장터에서의 이별. 화장터 주변은 4월이라 봄꽃이 만발했다. 따뜻한 봄 햇살에 너무나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봄꽃들. 그러나 그 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이 세상은 그 무엇도 의미가 없었다. 대전국립묘지에 총성이 울리고 아버지는 안치되셨다.

오늘도 비는 끝도 없이 내리는데 라디오를 켜니 정수라의 '아버지의 의자'가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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