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적한 마음을 파랗게 물들인 남해 호구산

호랑이와 원숭이를 닮은 산... 용문사 찾는 즐거움도 가져

등록 2006.07.24 21:15수정 2006.07.24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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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동안 날씨가 참으로 얄궂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무엇보다 얼마 전 내린 폭우로 온 나라가 마비된 듯한 느낌마저 들었던 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속상했다. 그리고 긴 장마 탓에 마음 내키는 대로 배낭을 메고 산으로 훌쩍 떠나지 못해 울적해졌다.

밤늦게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에 지난 22일 산악회를 따라 남해 호구산(626.7m·경남 남해군 이동면) 산행을 나섰다. 아침 8시 마산에서 출발한 우리 일행은 10시 50분께 남해읍 봉성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산행 코스는 괴음산(604m)으로 올라가 송등산(617.2m)을 거쳐 호구산 정상에 이르는 것으로 여름 산행 치고 많이 걷는 편이었다.


괴음산에서 송등산으로 가는 길은 사람 발길이 뜸해 보였다. 가파른 오르막도 많고 종종 위험스러운 바윗돌들이 있어 한순간 바짝 긴장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아무리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느낌이 들면서 점점 힘들었다. 또 온몸이 땀에 절어 걸음이 무겁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김연옥

송등산 정상.
송등산 정상.김연옥

낮 1시 30분께 송등산 정상에 이르렀다. 2시간 40분을 걸어온 셈이다. 한 고비가 지난 기분이 들어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그래도 거기서 호구산 정상까지 가려면 한참 더 걸어야 한다. 나는 송등산 정상의 적막한 풍경을 뒤로하고 계속 걸어갔다.

나보다 앞서 가던 두 분이 그늘진 곳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같이 밥 먹자는 말에 잠시 망설여졌지만 나는 계속 걷기로 마음먹었다. 산행하다 먹는 밥맛은 참으로 꿀맛이다. 그렇지만 그곳서 밥을 먹어 버리면 배불러 호구산을 오르지 못할 게 뻔했다.

송등산에서 바라본 호구산의 모습.
송등산에서 바라본 호구산의 모습.김연옥

호구산(虎丘山)은 그 생긴 형상이 마치 호랑이가 누워 있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금 걷다 보니 호구산 정상이 아득히 보였다. 배가 고프고 몸도 무거웠지만 다시 힘이 솟는 것 같았다. 호구산 정상에 이르는 길은 가파른 편이다. 그래도 어디서 불어오는지 바람이 시원하고 오르는 길도 운치가 있었다.

호구산 봉화대.
호구산 봉화대.김연옥

드디어 정상에 오른 시간이 낮 3시. 납산, 원산이라 부르기도 하는 호구산 정상은 바위로 되어 있다. 원숭이 원(猿)을 쓴 원산(猿山)이란 이름은 북쪽에서 그 산을 보면 원숭이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졌다 한다. 그리고 납은 원숭이의 옛말이니 같은 뜻이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사나운 호랑이로도, 또 꾀 많은 원숭이로도 보이는 호구산은 그런 점에서 재미있는 산이다.


호구산 정상. 납산(원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호구산 정상. 납산(원산)으로 부르기도 한다.김연옥

호구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광경.
호구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광경.김연옥

호구산 정상에 오르자 작은 돌로 쌓은 봉화대가 먼저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시야가 탁 트여 맑은 날씨에는 조망을 즐길 수 있다. 그날은 아름다운 앵강만도 아스라이 보일 정도로 날씨가 썩 좋지 않아 아쉬웠다.

하산 길에 임진왜란 당시 승려들이 용감하게 싸운 호국사찰로 알려져 있는 용문사(龍門寺·남해군 이동면 용소리)에 들렀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금산에 세운 보광사를 조선 현종 때에 호구산으로 옮겨 온 것이 바로 지금의 용문사라고 한다.


남해 용문사 천왕각.
남해 용문사 천왕각.김연옥

용문사를 가게 되면 천왕각(경남 문화재자료 제150호)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사천왕 발에 짓밟혀 신음하고 있는 것이 마귀가 아니라 탐관오리와 양반이다. 그렇다면 권력을 탐하지 않고 힘없는 백성들 곁에 늘 있겠다는 속내를 보여주는 건 아닐까.

임진왜란 때 승병의 밥을 퍼 담았던 구시통.
임진왜란 때 승병의 밥을 퍼 담았던 구시통.김연옥

정문 봉서루에 임진왜란 때 승병의 밥을 퍼 두었다는 구시통이 놓여 있다. 1천명의 밥을 담을 정도로 크나큰 함지박으로 통나무 몸통 둘레가 3m, 길이가 6.7m나 된다. 봉서루 계단을 오르면 바로 눈앞에 사찰의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용머리 조각이 돋보이는 대웅전(경남 유형문화재 제85호)이 있다.

남해 용문사 대웅전.
남해 용문사 대웅전.김연옥

대웅전 앞에 야외 법회를 할 때 괘불탱화를 걸어 놓는 당간지주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용문사를 찾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대웅전 뒤쪽으로 가면 푸른 차밭이 있다. 향긋한 차를 마시는 스님의 단아한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일주문을 지나 부도(浮屠) 9기가 있는 곳으로 혼자 올라갔다.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이 부도가 아닌가. 뭐라 말할 수 없는 엄숙한 공기에 그만 잰걸음으로 내려와 버렸다.

시원한 용문사 계곡.
시원한 용문사 계곡.김연옥

용문사는 시원한 계곡을 끼고 있다. 그 우렁찬 물소리에 산행의 피로마저 씻겨 가는 듯했다. 그런데 이번 폭우로 물과의 사투를 겪은 사람들 생각이 나자 끔찍스러운 소리로 들렸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계곡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도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든다.

안개가 조금 낀 삼천포-창선대교를 꿈길을 가듯 부드럽게 달리는 차창 밖에는 온통 파란 바다였다. 어느 새 긴 장마로 울적한 내 마음도 파랗게 물들었다.

덧붙이는 글 | 산행 코스는 남해읍 봉성마을- 괴음산- 송등산- 호구산- 용문사입니다.

덧붙이는 글 산행 코스는 남해읍 봉성마을- 괴음산- 송등산- 호구산- 용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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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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