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누구 죽인 거 아니죠?"

'요주의' 인간이 '요주의' 학생을 생각하며

등록 2006.07.25 09:15수정 2006.07.25 10:14
0
원고료로 응원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시구로 유명한 'T. S. 엘리엇'의 장시(長詩) <황무지(The Waste Land)>는 한 무녀(巫女)의 죽음에 대한 갈망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에피그라프(인용문)로부터 시작된다.

"정말 쿠마에서 나는 한 무녀가 항아리 속에 달려 있는 것을 똑똑히 내 눈으로 보았다. 애들이 '무녀야, 넌 무얼 원하니?' 하고 물었을 때 무녀는 대답했다 '난 죽고 싶어.'"

죽는 것이 소원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죽음에 대한 낭만적인 동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필경 절망하고 있는 사람이리라. 실오라기만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 지긋지긋한 절망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죽음뿐이니, 이쯤해서 생을 끝내고 싶은 유혹에 빠져들 법도 하다. 무녀가 처한 상황도 가히 절망적이다.

무녀는 젊었을 적에 아폴로 신의 사랑을 받아 장수할 수 있는 축복을 얻었지만 어리석게도 영원한 젊음을 요구하는 것을 깜빡 잊었다. 그 결과 늙어서 몸이 오그라들어 작은 항아리 속에 넣어져 전국의 이곳저곳에서 구경거리가 되었다. 동네 애들은 무녀에게 조롱하듯 묻는다. "무녀야, 넌 무얼 원하니?" 그때마다 무녀는 "난 죽고 싶어"라고 대답한다. 이런 상태에서 오래 사느니 오히려 죽어서 재생(再生)하기를 염원하면서.

딴은 그렇다. 다른 사람에 비해 이삼십 년을 더 오래 살 수 있는 장수의 축복을 누린다면 몰라도 수천수만 년을 작은 항아리 속에 들어갈 만큼 늙어 쪼그라든 몸으로 살아가야한다면 그것이 어찌 저주이지 축복이겠는가. 게다가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듯,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이 도래할지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 어쨌거나 죽음만이 그녀에겐 희망이었으니 이런 기막힌 아이러니도 없다.

내가 엘리엇의 시 <황무지>에 등장하는 무녀의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교사가 되기 위해 서른 너머 두 번째 대학에 다닐 때였다. 영미시를 강의하는 노교수님으로부터 시를 배우면서 나는 숨소리조차 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뒤늦게야 진짜배기 문학의 맛을 본 얼치기 문학도로서의 순수한 학구열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항아리 속의 무녀처럼 나도 어떤 죽음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자살충동을 느꼈다는 말은 아니다. 아무리 씻고 또 씻어도 금세 다시 더러워지고 마는 오염된 영혼의 장기(臟器)들이라고나 할까. 그것들을 우슬초로도 씻어낼 수 없어 나는 차라리 잘 드는 칼로 싹둑 베어 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나오는데 한때 주일학교 학생이었던 한 처녀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잠깐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내가 눈짓으로 재촉을 하자 느닷없이 이런 말을 했다.

"저, 어제 밤에 교회에 강도가 들어온 줄 알았어요."
"아니, 강도라니?"


"강도가 아니면 어떤 남자가 살인을 하고는 양심의 가책에 교회로 달려온 줄 알았어요. 어찌나 큰 소리로 통곡을 하던지 무섭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어요. 무슨 죽을죄를 졌는지 는 모르지만 다른 기도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큰 소리로 죽여 달라고만 했어요. 혹시 우리 교회 사람일까 싶어 나갈 때 몰래 따라 나가봤는데 그 사람이 바로… 선생님, 누구 죽인 거 아니죠?"

눈을 똥그랗게 뜨고 뚫어질 듯이 나를 바라보던 그 처녀에게 내가 어떤 대답을 해주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긴 그 이듬해 대학을 졸업하고 꿈에도 그리던 교단을 밟은 것이 벌써 스무 해 전의 일이니 그럴 만도 하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 무렵 나는 혹시 사범대학에서 교사가 되기 위한 지식 공부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눈 맑은 아이들의 착한 선생님이 되기 위한 영혼을 다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고 있던 신앙심 좋은 처녀를 놀라게 한 통곡의 시간들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나는 교단을 밟은 지 3년째 되던 해에 첫 담임을 맡았다. 그 해 2월 봄방학을 하루 앞두고 학년주임으로부터 한 해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할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학급 명단을 받았다. 가나다순으로 정해진 번호와 이름이 적혀 있을 뿐인 한 장의 종이를 마치 진귀한 보물처럼 받아들고 서 있다가 막 책상에 내려놓을 참이었다.

평소 나와 가깝게 지내던 한 동료교사가 갑자기 종이를 낚아채듯 가져가더니, 잠시 후 종이가 다시 내게로 돌아왔을 때는 한 아이의 이름 옆에 어떤 표시가 되어 있었다. '요주의' 인물임을 알리는 체크 표시였다.

학년이 바뀌는 학기말 즈음에 교무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담임을 맡은 아이들에 대한 신상을 미리 파악해두는 것은 학급운영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일부러 내 자리까지 와서 한 아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 선배교사의 고마운 성의에 퉁명스럽게 대응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날카롭게 표시가 된 그 자리가 마치 아이의 가슴을 후벼 파기라도 하듯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도 연필로 그어놓은 자국이어서 지우개로 깨끗이 지울 수가 있었다.

나는 왜 그 표시를 애써 지우려고 했을까? 선입관을 갖고 그 아이를 대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 교사로서 그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는 것. 그 표시를 선의로 해석하여 더 많은 사랑을 줄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 그런 분명하고 확실한 이유 말고도 내게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공정한 게임을 하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 아이는 나를 모르는데, 나만 그 아이를 아는 것이 어딘지 불공평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아이가 '요주의' 학생이라면 나도 그분 앞에 '요주의' 인간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오염의 정도가 더 깊고 더 심각한.

봄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자 내 앞에 나타난 그 아이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한낮 눈 맑은 어린 아이일 뿐이었다.

덧붙이는 글 |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글을 드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글을 드렸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AD

AD

AD

인기기사

  1. 1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2. 2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3. 3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4. 4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갚게 하자"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갚게 하자"
  5. 5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