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실패한 친구 부부와의 트럭여행

가난하지만 마음은 부자인 젊은 그들, 가장 시원한 여름 휴가

등록 2006.07.25 04:00수정 2006.07.28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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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동해 해수욕장의 모습.

동해 해수욕장의 모습. ⓒ 오마이뉴스 남소연


당시 친구 동우(가명)의 경제 상황은 최악이었다.


2001년의 뜨거운 햇살 아래 동우의 표정은 항상 어두워져 있었다. 일찌감치 이동통신 도매업에 뛰어들어 탄탄대로를 달렸고, 한 때는 '젊은 사장님'이란 소리를 듣기도 했던 친구.

그러나 너무 빠른 성공이 자만을 불러왔을까. 몇 건의 대형계약 실패는 동우를 거의 부도 직전으로 내몰았다. 집을 팔고 차를 팔고 자존심을 접어야 했다. 곁에서 지켜보기 안타까워하던 친구들이 마음도 정리할 겸 여름휴가를 제의했다.

"이 판국에 바다는 무슨…. 난 괜찮으니까 너희들이나 다녀와."
"잔소리 말고 같이 가. 너보다 제수씨를 위해서라고 생각해."


동우의 어린 아내는 예쁘고 마음씨가 착했다. 갑자기 닥친 불행 앞에서 흔들릴 법도 하건만 오히려 의연하게 친구를 보살펴줬다. 사정이 안 좋은 친구가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려 했지만, 사랑하는 이가 흔들리는 것이 안타까워 앞당긴 사람이었다.

결국 동우는 아내를 위해 우리의 여름휴가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렇게 출발 당일 아침에 모인 이들은 그들 부부와 또 다른 친구 둘에 각자의 애인, 늘 그렇듯 '나 홀로(?)'를 외치던 나까지 7명이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차를 어디서 구하지?

그런데 모두의 기쁜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타고갈 차량 두 대중 한 대가 그만 '퍼져' 버린 것. 전날 오후 AS센터에 차를 맡겼다는 친구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근처의 렌트카 업체를 돌았지만 업체 직원들은 혀를 끌끌 찼다. 성수기 시즌에 남아 있는 차량이라곤 대여료 감당이 불가능에 가까운 이른바 '회장님급' 뿐 이었던 것이다.

불안한 듯 눈치를 보는 여인들을 뒤로 하고 우리는 편의점에 모여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대형차를 빌리네 마네, 그럼 니가 돈 다 낼 수 있냐, 어디 아는 사람한테 빌리자, 너같으면 차 빌려주겠냐 등등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 때 나선 동우의 한 마디.

"아이, 자식들. 기다려봐, 내가 빌려볼게!"

앗, 저 카리스마! 저 늠름한 자태. 역시 사장님 출신이라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우리 모두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위풍당당하게 사라져가는 동우의 뒷모습에 가열찬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30분, 1시간, 1시간 반…. 편의점 직원이 장시간 자리를 지키는 우리를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랬다. 도대체 녀석은 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이 피서철, 누가 "어서 가져가십쇼"하며 차를 내줄 것인가.

"야아, 동우한테 전화 좀 해봐."
"아 글쎄.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하잖…, 전화왔다. 여보세… 뭐라고? 차 빌렸다고?"


대한독립만세였다. 우리는 길길이 뛰며 목놓아 기뻐했다. 우울증에 실어증이라도 걸린 듯 했던 여인들의 표정이 CF 모델처럼 대번에 밝아졌다. 모두들 각자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때 이어진 누군가의 한 마디.

"야, 근데 차 뭐 빌렸대?"
"아 참, 깜빡하고 그걸 안 물어봤네. 뭐 소형이나 준중형쯤 되겠지."


순간 뒤에서 '빠앙'하는 경적이 울렸다. 뒤를 돌아본 우리는 입을 쩍 벌렸다. 동우가 타고 온 차는 0.5톤짜리 2인승 미니 트럭이었던 것이다.

젊은 부부, 각자 다른 차 타고 휴가 떠나다

a 그날, 친구 부부는 각자 다른 차에 몸을 싣고 휴가를 떠났습니다. (고속도로 자료사진)

그날, 친구 부부는 각자 다른 차에 몸을 싣고 휴가를 떠났습니다. (고속도로 자료사진) ⓒ 이인배

자세히 보니 눈에 익은 차량이었다. 동우와 같은 층 사무실, 최씨 아저씨가 물품을 싣고다닐 때 쓰던 차량이었다. 칠이 벗겨진 몸체, 뽀얀 먼지가 내려앉은 유리창, 가죽이 뜯겨나간 시트. 게다가 옆면에 투박하게 찍어낸 '○○실업' 마크.

모두에게서 드러나게 실망의 빛이 떠올랐지만 특히 제수씨가 곤혹스러워보였다. 아무리 속이 깊다 해도 20대 초반의 나이만큼 휴가를 앞두고 기대에 들떴던 그녀. 대놓고 말은 못해도 굳어진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미안하다. 차가 이것밖에 없네. 당신 이 차 탈래? 아니다. 이거 에어컨도 고장나서 안 나오거든. 당신은 저차 타고 와. 니가 나랑 타고."

결국 친구의 옆자리는 나의 차지였다. 제수씨는 실망이 꽤나 컸던지 군말없이 나머지 한 대의 차량에 올랐다. 운전대를 잡은 친구는 말이 없었다. 창문을 열었지만 습한 바람은 시원하기보단 열기에 가까웠다.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담배를 비벼끈 친구가 입을 열었다.

"내가 죄인이다. 마누라 볼 낯이 없다."
"죄인은 무슨, 가서 재미있게 놀면 되지. 야, 너까지 그러면 제수씨 기분만 더 안 좋아지지. 웃어. 그래야 제수씨도 웃을 거 아냐."


친구는 "그렇겠지?"라고 물었고 나는 "그럼 당연하지"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잠시 후 동우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수건을 목에 걸고 운전석 옆자리에 구겨져 있던 밀짚모자를 눌러썼다. 이어 '부앙'하는 소리를 내며 우리의 차는 앞서던 차 옆에 바짝 붙어섰다.

"여보, 문 좀 내려 봐. 나 왔어! 여보~."

친구의 손짓에 옆 차의 창문이 내려갔다. 이어 과장된 동우의 행동에 나머지 일행들의 웃음이 터져나왔다. "수박이 왔어요. 싱싱한 꿀참외가 한 바구니에 오천 원, 두 바구니는 안 팔아. 계란 사아~" 친구 애인들이 깔깔거리며 손뼉을 쳤다. 하지만 단 한사람, 동우의 부인만은 피곤한 듯 애써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다.

세상의 가장 시원한 바람은 그들 부부에게

그래도 한동안을 떠들던 친구는 차가 휴게소에 들어설 때쯤에야 장난을 그쳤다. 하지만 쾅 하고 문을 닫고 내리는 제수씨의 뒷모습에는 찬바람이 도는 듯 했다.

모두가 볼일을 마치고 아이스크림을 베어물고 있을 때도 그녀는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다시 한참을 기다려서야 저만치에서 하늘하늘 걸어오는 그녀. "왜 이렇게 늦었어? 다들…"까지 말하던 친구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가가 빨개져 있었던 것이었다. 모두가 일제히 웃음을 거두었다.

제수씨는 그녀 몫으로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외면한 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빨리 가자. 나 이번엔 이 차 탈래."
"불편해. 그냥 저 차 타. 자기… 울었어?"
'울긴 누가 울어! 비켜. 빨리 타게. 저 차 불편하단 말이야. 자기만 편하게 가려고 그래."


그녀는 만류하는 친구를 밀치고 기어이 트럭으로 옮겨탔다. 그리고 다시 강원도 바다로 향하는 길. 뒤를 보니 멀리서도 그녀의 얼굴이 환해져 있었다. 친구의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고,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고, 쉴 새 없이 재잘거리고….

창문을 활짝 연 채 달리는 그들 부부의 모습이 따뜻하고 동시에 시원해 보였다. 그들에게 다가가는 바람이 세상 무엇보다도 부드러워 보였다. 문득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내리고 싶어졌다.

덧붙이는 글 | ☞ [기사공모] 2006 이 여름을 시원하게

덧붙이는 글 ☞ [기사공모] 2006 이 여름을 시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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